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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죄에서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역경과 불행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3월 20일 사순 제3주일 삼종기도 훈화에서 이번 주간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징벌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죽음을 낳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의 이기심이 관계를 갈갈이 찢어놓습니다. 우리의 잘못되고 폭력적인 선택이 악을 불러 일으킵니다.” 아울러 참된 해결책은 회심이라고 말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사순 시기 여정의 중심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몇 가지 사건사고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며 시작합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일을 알립니다(루카 13,1 참조). 이 비극적인 소식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뒤따르는 듯 보입니다. 이 끔찍한 사건들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혹시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벌하신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오늘날에도 관련이 있습니다. 암울한 소식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가 악 앞에서 무력함을 느낄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자문하곤 합니다. 이는 혹시 하느님의 징벌이 아닐까?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벌하시려고 전쟁이나 감염병의 세계적 확산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개입하지 않으실까?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악이 우리를 짓누를 때, 우리는 명석함을 잃을 위험에 빠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쉬운 답을 찾으려고 결국 하느님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많은 경우 신성모독이라는 나쁘고 추한 습성이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역경과 불행을 하느님의 책임으로 돌리는지요! 항상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결코 강압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시며 그저 제안을 하시는 그분께 말입니다. 결코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분,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으시는 그분께 책임을 돌립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악행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려는 생각을 거부하시고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빌라도가 죽인 사람들과 탑에 깔려 죽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자비하고 앙갚음을 일삼는 하느님에게 희생된 것도 아닙니다. 그런 하느님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악은 절대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시편 103,10) 당신 자비에 따라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외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자비로이 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탓하는 대신 우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낳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의 이기심이 관계를 갈갈이 찢어놓습니다. 우리의 잘못되고 폭력적인 선택이 악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 지점에서 주님께서는 참된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무엇일까요? ‘회심’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 이는 절박한 초대입니다. 특히 이 사순 시기에 말입니다. 마음을 열고 이 초대를 받아들입시다. 악에서 돌아서고, 우리를 유혹하는 죄를 그만두고, 복음의 논리에 마음을 엽시다. 사랑과 형제애가 다스리는 곳에서 악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회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시고 이 지점에서 우리를 도우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경우 우리가 같은 잘못과 같은 죄를 반복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또한 우리가 낙담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며, 때로는 선을 행하겠다는 우리의 노력이 악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무용지물로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호소를 하신 다음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인내하신다는 비유를 들어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인내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인내심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무화과나무의 모습을 제시하십니다. 그 무화과나무는 제철에 열매를 맺지 않지만 잘려나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나무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시고 또 다른 가능성을 주십니다. 저는 하느님의 아름다운 이름이 “또 다른 가능성의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십니다. 언제나, 언제나 말입니다. 그분의 자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하십니다. 곧, 우리를 당신 사랑에서 잘라내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온유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다시 주시는 데 지치거나 낙심하지 않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신뢰하시고, 인내롭게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낙담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을 심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시며 아버지처럼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최고의 아버지이신 그분께서는 여러분이 아직 이루지 못한 결과를 보시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앞으로 맺을 수 있는 열매를 보십니다. 여러분의 부족함을 따지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잠재력을 격려하십니다. 여러분의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미래에 신뢰를 두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까이로 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친밀함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온유한 사랑으로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방식은 친밀함, 자비, 온유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동정 마리아께 우리를 희망과 용기로 채워달라고 청합시다. 또한 우리 안에서 회심의 열망이 불타오르도록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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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3월 2022, 14:35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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