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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슈워츠 교수 피터 슈워츠 교수   역사

피터 슈워츠, 이제는 불가사의한 영역이 아닌 심장병 이야기

이야기는 1970년 TV 생방송 중 젊은 여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시작합니다. 이 사건은 급히 치료하지 않으면 갑작스런 죽음에 이르는, 당시엔 흔치 않은 심장병리학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피터 슈워츠 교수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는 생방송 당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시작으로 QT 간격 연장증후군 연구에 일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Marina Tomarro / 번역 박수현

1970년 10월이었습니다. 체사리나 보노미(Cesarina Bonomi)는 밀라노에서 일하며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브레시아 지방 출신의 19세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가끔씩 기절하거나 열이 자주 나고 항상 피곤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대체로 건강했습니다. 그런 체사리나에게는 인생에서 열렬하게 바라는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인기였던 퀴즈 방송인 리스키아투토(Rischiatutto) 프로그램을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미케 본조르노(Mike Buongiorno)가 진행하는 퀴즈에 방청객으로 참석하여 생방송으로 보는 것이 바로 그 꿈이었습니다. 어느 날 체사리나에게 큰 행운이 찾아 왔습니다. 친구 덕분에 체사리나는 라이브 쇼로 관람할 수 있도록 초대되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관람석에 앉았습니다. 그녀는 매우 흥분했습니다. TV에서 여러 차례 시청한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긴장하며 집중했습니다. 어느 순간 사회자가 청중에게 질문하는 시간이 되었고, 방청객 중 체사리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체사리나는 순간 너무 놀라 감정이 고조되었고, 마침내 견딜 수 없게 되어 심장이 멎었습니다. 사회자의 당혹감과 함께 스튜디오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날 저녁에 참석한 많은 방청객들 사이에서 체사리나가 즉사했던 것입니다.

인생을 바꾸는 만남

우연의 일치인지, 피터 슈워츠(Peter Schwartz) 교수는 이 가엽고 불쌍한 체사리나의 여동생의 진료를 봐주게 되었습니다. 여동생의 이름은 아고스티나(Agostina)였는데, 이미 세상을 떠난 언니와 똑같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8살이었던 그녀는 슈워츠 교수가 연구하며 재직하고 있는 밀라노 대학의 종합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현재 슈워츠 교수는 롬바르도 시(市)에 위치한 이탈리아 심장병리학 연구소에서 유전학 기원의 심장 부정맥 치료와 연구를 위한 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아고스티나를 방문했을 때, 아무도 이 질병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 아이는 처음에 신경정신과로 입원했지만, 심전도 검사를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 문제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슈워츠 교수와 그의 첫 환자 아고스티나 보노미
슈워츠 교수와 그의 첫 환자 아고스티나 보노미

불가사의한 증후군을 연구하다

슈워츠 교수는 어떤 결과도 나올 것 같지 않을 첫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러한 심전도의 이상 징후는 저와 동료들에게는 불가사의한 영역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소아과 의사가 저에게 국제의학 문헌을 조사하자고 제안했는데, 거기서 저는 이 병에 관한 설명에서 실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 설명에 관한 내용에 ‘QT 간격 연장증후군(Long QT syndrome, QT는 심전도의 두 파동 사이의 간격)’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질환은 유전적 휘귀질환으로, 심장의 전기체계가 다음 심장박동을 위해 스스로 재충전을 하는 과정에서 정상인에 비해 긴 시간이 필요로 하는데, 심장이 충분한 피를 내보내지 못하면 뇌도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게 되어 사망에 이르는 질병입니다. 처음에는 빨라진 심장박동을 낮추는 데 효과적인 베타 차단제(beta blocker)가 아고스티나의 심장을 간신히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습니다. 슈워츠 교수는 계속 연구와 실험을 하면서, 이 아이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왼쪽 교감 심장 신경을 절단하여 뇌와 심장 사이의 연결을 “방해”하는 수술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보노미 집안에서는 큰 언니가 사망한 뒤 몇 년이 지나 또 다른 이름의 어린 딸 체사리나가 태어났는데, 그녀는 불행히도 언니의 이름뿐 아니라 언니의 질병도 물려받았습니다.

저는 당신을 믿어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22살의 자녀를 둔 어머니가 된 체사리나 보노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슈워츠 교수님이 저의 부모님께 이 수술을 제안하셨을 때, (사실 교수님은) 이 실험을 실험실에서만 시도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버지는 교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셨죠. 하지만 교수님의 열정과, 첫째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아직도 감정적으로 흔들리며 힘들어하는 우리 가족의 어려운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교수님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1973 년 오전, 아고스티나와 그녀의 어머니는 밀라노로 가는 버스에 탔습니다. 아고스티나는 자신의 상태를 잘 아는 젊은 의사와 함께 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병원으로 향한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슈워츠 박사는 그녀에게 자신을 믿어달라고 상냥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는 그녀가 곧 잠들 것이지만 깨어날 때는 새로운 삶을 누릴 것이라며, 기절하거나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뛰어다니며 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슈워츠 교수와 함께 일하는 숙련된 외과의사의 손에 맡겨진 채 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여전히 감동에 젖은 체사리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루르드의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깊었고, 자주 폴리클리닉 근처의 작은 성당에서 깊은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만약 하늘에 간 언니가 구원을 받았다면, 아이를 새롭게 갖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8남매였거든요.”

새로운 삶을 향해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수술이 끝난 그 순간부터 아고스티나는 새로운 기쁨의 삶을 살았고 이듬해엔 남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고스티나는 더 이상 기절하지도 않았고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매년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슈워츠 교수를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로 했다면서, 슈워츠 교수에게 혼인식 증인이 되어달라고 청했습니다. 슈워츠 교수가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 수많은 QT 간격 연장증후군의 영향에서 다른 아이들도 구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슈워츠 교수도 자신의 첫 환자였던 아고스티나의 요청에 감동 받았습니다. “(혼인식을 위한) 제대에서 저는 아고스티나가 베타 차단제를 복용했는지 계속 물어보았습니다. 혼인식 중에 너무 흥분하면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모든 일은 아주 잘 끝났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고스티나는 최근 또 다른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첫 번째 사례에서 슈워츠 교수는 이 병리학에 대한 수년간의 심도 깊은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저는 이 질병을 가진 환자들을 더 잘 보살피기 위해 미국에서 수년간 연구를 했습니다. 밀라노로 돌아와서는 QT 간격 연장증후군에 대한 많은 지식을 심화하기 위해 유전학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많은 의사들이 이 첫 번째 신경 제거에 대한 개입(수술)을 따랐으며, 이제는 베타 차단제로 보호되지 않는 경우에 대한 표준 치료법이 되었습니다.” 환자 중에는 아고스티나의 자매인 체사리나도 있습니다. 체사리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성 피로 증후군이 저에게 발생했을 때 저는 누구를 만날 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수술 후 후속진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긴 심전도를 기록하기 위한 장치와 함께 보낸 많은 시간이 기억납니다. 저의 기분을 전환시키려고 부모님은 두오모 주교좌성당의 첨탑으로 저를 데려가 금으로 장식된 성모님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슈워츠 교수를 증인으로 한 아고스티나 보노미의 혼인식
슈워츠 교수를 증인으로 한 아고스티나 보노미의 혼인식

밀라노에서 남아프리카까지

슈워츠 교수의 명성은 전 세계로 알려졌고, 남아프리카에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는 어째서 똑같은 유전적 결함이 있으면서 정반대의 운명을 따르는 사람이 있는지를, 곧 어째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남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매년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20년 동안 연구했습니다. 약 500명의 사람들로 이뤄진 25가구 모두가 QT 간격 연장증후군에 시달렸습니다. 이들 모두는 지난 1690년에 남아프리카로 이주했던 한 조상의 후손들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이 사건으로 인해 저의 이름을 네덜란드어로 피터 슈워츠로 불리길 원했습니다. 이 특별한 환자 집단은 처음으로 환자의 사망 위험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유전적 변이체를 식별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어떤 대상자가 더 높은 위험성을 가진 사람인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환자들에게) 가능한 최고의 보호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유럽 전역에서 많은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 밀라노에 있는 이탈리아 심장병리학 연구소로 와서 이 권위자를 찾습니다. “저는 종종 불안에 빠진 부모님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아이를 다른 여러 곳으로 데려간 끝에 우리를 찾아옵니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 많은 돈을 썼음에도 갑자기 아이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슈워츠 교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의사가 책상 반대편에 앉은 부모의 입장에 서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치료하고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두려움에 빠지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의사가 부모 입장에 설 수 있다면, 부모의 행동과 태도는 변합니다. 더구나 무엇보다도, 이 질병은 이제 매우 잘 치료되는 병입니다. 만약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면 말입니다.”

노에미 이야기

노에미 조반네(Noemi Jovane)가 11살 때의 일입니다. 그녀는 이따금씩 알고 있던 내용이나 일상들을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슈워츠 교수를 찾아가보라는 권유를 받기 전까지, 그녀는 겁에 질린 채 여러 병원을 찾아 다니면서 통원치료를 했습니다. “(슈워츠 교수님을 만난) 2014년 이후 저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교수님은 저에게 아버지와 다름 없었습니다. 저의 두려움을 잘 이해해주셨고, 어려운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심리학자를 제 곁에 두셨습니다. 지난해 저는 이 질병에 대한 새로운 약물 치료법을 위한 실험 연구계획에 참여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교수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이 저를 안심시키고 힘을 주었습니다. 지금 저는 컨디션이 좋습니다. 또 미래를 바라보며 일상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전의 저에게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왼쪽부터 노에미 조반네, 슈워츠 교수, 체사리나 보노미
왼쪽부터 노에미 조반네, 슈워츠 교수, 체사리나 보노미

계속되는 여정

슈워츠 교수는 오랜 경력 동안 국제적인 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난 6월에는 파리의 프랑스 연구소에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의 르풀롱(Lefoulon) 재단의 권위 있는 그랑프리 시앙티픽(Grand Prix Scientifique) 드랄랑드(Delalande) 상을 받게 되어 기쁩니다.” 이 상은 심장학 및 심혈관 연구 분야에서 노벨상 다음으로 국제적인 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슈워츠 교수는 감격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시상식 당일에는, 약 50 년간 심혈관 연구라는 놀라운 모험에 참여했던 모든 환자와 협력자가 저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연구는 두 자매인 체사리나와 아고스티나와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이 두 자매가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저의 인생도 없었을 것입니다.”

파리에서 권위 있는 그랑프리를 받고 있는 슈워츠 교수
파리에서 권위 있는 그랑프리를 받고 있는 슈워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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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10월 2019, 1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