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을 구하십시오”
Adriana Masotti / 번역 안주영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신부는 3월 15일 금요일 교황궁 내 구세주의 어머니 성당(Cappella Redemptoris Mater)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교황청 관료들을 대상으로 첫 번째 사순 특강을 시작했다. 사순 특강은 “하느님을 ‘바라보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했으며, 질문의 답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는 말씀에 있다고 말했다.
성(性)과 관련된 순결
칸탈라메사 신부는 ‘순결’과 관련해, 많은 뜻 가운데 ‘지향의 올바름’과 ‘행실의 깨끗함’을 택했다. 이와 상반되는 두 개의 태도는 위선과 성적 남용에서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이어 성적 차원의 무질서에 대해 설명했다.
“음란한 죄는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게 하거나,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더라도 모든 것을 왜곡된 채로 바라보게 합니다. 하느님을 친구, 동료, 수호자가 아니라 적대자, 원수로 만들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적인 인간은 성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상대방의 물건과 남의 아내를 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하느님은 “(이것은) 해야 한다!”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길을 가로 막는 분으로 여겨집니다. 죄는 하느님이 절대로 존재하지 않기를 원할 만큼, 인간의 마음속에서 하느님을 거슬러 이유 없이 분노를 불러 일으킵니다.”
지향의 올바름으로서의 순결
칸탈라메사 신부는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강한 경고를 다시 제시하면서, 이제 막 시작한 사순 시기에 ‘지향의 올바름’으로서의 순결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일상의 양심성찰을 통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강하게 꾸짖으신 위선(적인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성찰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가 막힌 일”이라며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위선은 위선이라는 것을 인정했을 때 극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가 위선이라는 이중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진짜 우리의 삶과 우리가 만들어낸, 혹은 우리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허상의 삶에 집중하고 있는지 성찰해보십시오.”
위선적인 태도에 담긴 거짓과 이중성
칸탈라메사 신부는 위선이라는 말이 본래 연극 용어에서 유래됐으며 바깥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감정의 내면적 현실과 일치하지 않도록 연기하는 거짓이라는 특징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분명했으며, 오늘날에도 위선이라는 말의 부정적인 의미가 그대로 남아 있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위선적이라고 자랑하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위선은 대중에게 보이려고 인생을 하나의 연극으로 만듭니다. 가면을 쓰고 연기자가 되기 위해 인격체가 되는 것을 중단합니다. 사람과 연기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연기자는 사람이 변한 모습입니다. 사람은 얼굴을 갖고 있지만, 연기자는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은 근본적인 순수함으로 드러나지만, 연기자는 모든 것이 무대의상과 분장입니다. 사람은 진정성과 본질이지만, 연기자는 허구와 기교입니다. 사람은 신념을 따르지만, 연기자는 대본을 따라 연기합니다.”
하느님보다 인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위선
칸탈라메사 신부는 “타고난 인간의 이러한 성향은 이미지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문화의 영향으로 한없이 가중됐다”며 “따라서 영과 자비, 덕의 가치에 대한 열망이 강한 곳에 그러한 가치들이 부족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유혹도 강하기 때문에, 특별히 믿음이 강한 이들과 수도자들이 위협을 받는다”고 말했다. 또한 위선은 단지 거짓이나 이중성만이 아니라, 피조물과 대중을 첫 번째 자리에 놓고 하느님을 두 번째 자리로 강등시킬 뿐만 아니라 상대방마저도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으로 전락시켜 버리기 때문에 사랑이 결여돼 있다고 설명했다.
위선을 치료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칸탈라메사 신부는 “그리스도는 단호하게 위선을 꾸짖으신다”며 “그러나 위선을 물리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인정한다”고 말했다. 이어 선한 빛으로 보이고 싶고, 좋은 인상을 주며, 사람들이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을 피할 수 없으므로 매일 지향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본능적인 감각이 아니라 의지가 담긴 지향으로,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구체적인 태도로 “위선이 하지도 않은 선행을 자랑하려고 하면, 이러한 성향에 저항하기 위한 하나의 효과적인 치료법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며 “때때로 자신이 한 선행도 숨겨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드러나지 않게 단식하며, 아무도 모르게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1-6 참조)라는 말씀을 실행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이는 정해진 규칙을 설명하는 게 아닙니다. 이어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보는 것이 좋을 때와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때를 식별하라는 의미입니다.”
꾸밈없는 눈을 가지십시오. 하느님은 꾸밈이 없으십니다
위선을 거슬러 단련하라고 초대하는 하느님의 또 다른 말씀은 단순함이다. 이는 순진함이나 형식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칸탈라메사 신부는 설명했다. 단순함은 선을 행할 때 계산하지 않으며 진실성과 진리 안에서 살고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어 칸탈라메사 신부는 “단순함의 덕을 지닌 가장 위대한 모델은 바로 하느님”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성경과 성인들의 글을 통해 볼 수 있는 하느님을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들로는 충만, 결백, 고결, 완전한 일체 등이 있다. 하느님에게는 아무것도 덧붙일 수 없고 아무것도 뺄 수 없다. “단순함은 영적 여정에서 가장 힘겹고 가장 아름다운 덕들 중에 하나이고 이를 얻기 위해 노력할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시편 139,1-3).
시편 139편을 읽고 살펴보십시오
칸탈라메사 신부는 특강을 마무리하며 교황과 교황청 관료들에게 시편 139장을 읽을 것을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위선과 이중성이 하느님의 시선 보다는 인간의 시선을 찾는 것을 뜻한다면, 우리는 여기 시편 139장에서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을 바치는 것은 마치 우리 자신이 엑스선 사진에 투과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편에서 가장 감탄할 만한 것은 하느님의 시선을 통한 인식이 가장 은밀한 생각들을 지켜보고 들춰내어 수치심과 불편함을 야기시키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다듬어주기를 원하며 하느님께서 완전한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시선이기에 기쁨을 선사한다는 것입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다음과 같이 시편의 마지막 구절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가 되도록 초대하며 특강을 마쳤다. “하느님, 저를 살펴보시어 제 마음을 알아주소서. 저를 꿰뚫어 보시어 제 생각을 알아주소서(시편 139,23). 제가 거짓의 길로 가면 생명의 길로 저를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