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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처럼 교회는 잃어버린 이들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0월 30일 연중 제31주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이날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을 풀이했다. 교황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잘못투성이인 우리 과거에 그치지 않으시고” “먼저 구원하시려고 피조물을 찾으시기” 때문이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전례 복음은 예수님과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의 만남을 들려줍니다(루카 19,1-10 참조).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찾다, 애쓰다(cercare)’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찾다’라는 동사에 주목해 봅시다. 자캐오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다’”(루카 19,3 참조).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절 참조). 서로를 찾는 두 눈길, 곧 예수님을 찾는 ‘자캐오의 눈길’과 자캐오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눈길’에 잠시 머물러 봅시다.

먼저 ‘자캐오의 눈길’을 살펴봅시다. 그는 세리였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통치자들을 대신해 세금을 거둬들인 유다인들 중 한 명으로, 로마 통치자들의 지위를 이용한 조국의 배신자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자캐오는 부자였음에도 모든 이에게 미움을 받으며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성경 본문은 그가 “키가 작았다”(3절 참조)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그의 내면적인 천박함, 곧 부정직하고 안일한 삶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항상 밑바닥 삶을 바라보면서 말이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작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를 씁니다.’ 무언가가 그분을 보라고 부추깁니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4절). 그는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습니다. 모든 것을 지배하던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자기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며 조롱을 받는 길로 들어섭니다. 예를 들어 경제부 장관이 무언가를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봅시다. 그는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조롱거리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낮은 상태, 비천한 상태에 있었던 자캐오가 다른 눈길을 찾아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눈길이었습니다. 그는 아직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도덕적으로 낮고 천박한 늪에 빠진 자기 자신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본요점은 이것입니다. 곧, 자캐오는 우리가 인생에서 결코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정말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우리는 항상 다시 시작하고, 다시 출발하고, 회심하려는 열망에 자리를 내어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캐오가 한 일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두 번째 측면, 곧 ‘예수님의 눈길’은 결정적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잃어버린 이들을 찾아 나서라고 그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이르러 자캐오가 올라있던 나무 곁을 지나가십니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참조) 예수님께서 위를 쳐다보시며 말씀하시는 이 장면은 아래에서 자캐오를 올려다본다는 뜻이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렇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에서 내려다보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욕되게 하시거나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와 반대로, 낮은 곳에서 우리를 올려다보십니다. 우리의 발을 씻기시려고 몸을 낮추시어 우리를 올려다보시며 우리의 존엄을 되찾아 주십니다. 따라서 자캐오의 눈길과 예수님의 눈길이 교차하는 장면은 구원의 역사 전체를 요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류는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을 찾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먼저 구원하시려고 피조물을 찾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를 기억합시다. 하느님의 눈길은 잘못투성이인 우리 과거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무한한 신뢰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키 작은 사람’, 곧 복음의 도전, 인생의 도전에 닿지도 못하고 문제와 죄에 빠져있는 사람으로 느낄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자캐오의 경우처럼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모신다면 그분께서는 우리 집에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가? 우리는 부족함을 느끼고 이내 체념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주저앉아 낙담하는 바로 그때에 예수님을 만나려고 애를 쓰는가? 더 나아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나 잘못투성이인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는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멸시하고, 배제하는 눈길,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길인가? 다른 사람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도와줄 때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오직 이 경우에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잃어버린 이들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잃어버린 이들을 연민으로 찾아 나서시는 그리스도의 눈길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눈길, 언제나 그리스도의 눈길입니다. 교회의 눈길은 심판자의 눈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겸손하게 바라보신 성모님께 기도합시다. 성모님께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선물로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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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10월 2022, 13:21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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