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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느님과 거리를 두면 하느님께서 괴로워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9월 11일 연중 제24주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주님께서는 손해와 위험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을 지니신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부재를 두고 괴로워하십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전례의 복음은 세 가지 ‘자비의 비유’(루카 15,4-32 참조)를 들려줍니다. 비유가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육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리자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 가운데 계셨기 때문에 분개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이런 행동은 종교적으로 스캔들을 일으키는 일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으시며 모든 이가 당신의 잔치에 참여하길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를 당신 자녀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입니다. 아무도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이입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비유는 복음의 핵심을 잘 요약해줍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시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길을 잃을 때마다 우리를 찾으러 오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을 대변하는 비유의 세 주인공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동,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여인, 탕자의 아버지입니다. 이 세 주인공의 공통점을 살펴봅시다. 기본적으로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상실에 대한 조바심(l’inquietudine per la mancanza)’으로 정의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양을 잃어버리든, 은전을 잃어버리든, 아들을 잃어버리든, 비유의 세 주인공은 모두 잃어버린 것이 있기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세 주인공이 모두 수지타산을 계산해 본다면 안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동은 양 한 마리를 잃었지만, 그에게는 다른 양 아흔아홉 마리가 있습니다. “그 까짓거, 하나쯤은 잃어버려도 괜찮아. (…)” 여인은 은전 한 닢을 잃었지만, 다른 은전 아홉 닢이 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도 자신에게 순종하고 충실한 다른 아들이 있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러 떠나버린 아들을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럼에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 목동, 여인,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 양, 은전, 떠나버린 아들 등 상실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잃어버린 이를 염려하고, 여기 없는 이를 그리워하며,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를 기다려줍니다.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길’ 원하니까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이런 분이십니다. 곧, 행여나 우리가 그분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그분은 “평온”하기는커녕 가슴 졸이시며 슬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 품 안으로 데려올 때까지 우리를 찾아 나서십니다. 주님께서는 손해와 위험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을 지니신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부재를 두고 괴로워하십니다. “애먹이는 아들이 집을 나갔는데 무엇이 그리도 괴롭다는 말인가요?” 괴로워하십니다. 괴로워하시고 말고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거리를 둔 것 때문에 괴로워하시고, 우리가 길을 잃을 때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는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 ‘하느님께서는 항상’ 두 팔 벌려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시편의 노래처럼 주님께서는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고 늘 깨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시편 121,4-5 참조).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처럼 주님을 닮고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나 잃어버린 사람에 대해 조바심을 내고 있는가? 우리는 행불자들, 그리스도인 삶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두고 아쉽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러한 내적 조바심이 생기는가, 아니면 우리끼리 방해받지 않고 평온하게 지내려 하는가? 바꾸어 말해, 우리는 우리 공동체가 잃어버린 사람들을 두고 진정으로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마음에 깊이 와 닿지 않은 채로 아쉬운 척하고 있는가? 나는 내 삶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두고 진정으로 아쉬워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와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일말의 연민 없이 우리끼리 편안하게 잘 지내고, 우리 단체만 –  “저는 아주 훌륭한 사도직 단체에 다닌답니다.” – 조용하고 행복하게 지내는가? 이는 단순히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문제가 아니라 복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그 목동은 “나에게는 이미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더 있는데 어찌 시간을 허비하여 잃어버린 양을 찾으리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 찾아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성찰해 봅시다. 믿지 않는 사람들, 멀리 떠나간 사람들, 괴로워하며 사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기도하는가? 우리는 친밀함, 연민, 온유한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방식을 통해 멀리 있는 이들을 끌어당기는가?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께서 가장 그리워하는 자녀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주변의 지인 중에 “당신은 하느님께 중요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하지만 저는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고, 이런 나쁜 짓과 저런 일도 저질렀습니다. (...)”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 “당신은 하느님께 중요한 사람입니다” 하고 말해주십시오. “당신은 하느님을 찾지 않지만 그분께서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말해주십시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사는 우리가 이러한 물음에 한껏 동요되도록 합시다. 아울러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찾아 나서고 돌보는 데 지치지 않으시는 어머니 성모님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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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9월 2022, 05:35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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