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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교회는 계명을 강요하지 않는 화해의 집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7월 25일 에드먼턴 예수성심성당 본당 공동체와 퍼스트 네이션 원주민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 무엇도 침해된 존엄성, 악에 대한 체험, 배신당한 믿음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교황은 상대방을 동화시킴으로써 위로부터 내려온 평온함이 아니라 자유와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화해를 위해 협력하도록 초대했다.

Antonella Palermo / 번역 이재협 신부

예수님께서는 ‘친구’이자 ‘순례자’로 지상생활을 하셨으며,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이 ‘친구’이자 ‘순례자’로 캐나다 원주민들의 땅에 들어선다. 교황은 과거 많은 그리스도인이 원주민의 고유한 문화를 손상시킨 아픔에 의한 상처와 부끄러운 마음이 “결코 없던 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기존의 틀에 끼워 맞추는 교육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재능을 증진시키는 교육 원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또한 화해의 진정한 복음적 의미는 우리의 작업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물이라고 강조했다.

예수성심성당에서의 만남을 마무리하는 교황
예수성심성당에서의 만남을 마무리하는 교황

대화와 섬김의 성지

원주민 전통 천막인 티피(teppe)의 뼈대를 이루는 긴 막대기 네 개가 제대를 중심으로 제단 위에 설치됐다. 교황은 에드먼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중 하나인 퍼스트 네이션 원주민들의 ‘집(티피)’인 본당 공동체, 곧 예수성심성당에 도착했다. 캐나다 사도 순방의 두 번째 공식일정인 이번 만남은 교황이 많이 고대한 순간이다. 한 원주민 그룹이 전통 리듬에 맞춰 북을 두드리는 동안 교황이 휠체어를 타고 성당에 입장해 제대를 중심으로 제단 위에 티피를 상징하는 네 개의 긴 막대기 아래 한가운데에 자리했다.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 소속 수사이 제수(Susai Jesu) 신부는 신자들의 큰 박수 소리와 함께 입장하는 교황을 맞이하고, 본당 공동체와 원주민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감사를 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래 전부터 이곳은 만남, 대화, 화해, 섬김의 성지입니다.” 교황도 언급했듯 이 본당에는 원주민과 과거 식민지 개척자의 후손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가톨릭 신앙이 원주민 문화 안에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지난 2년간 화재 피해 복구 작업을 마친 성당은 에드먼턴에 자리 잡은 많은 이주민과 난민을 위한 영적 보금자리가 됐다. “우리는 교황님과 함께 걷고 아픔의 장소로 가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를 전하고자 합니다.”

교회, 열린 집이며 포용하는 집

교황은 역사의 상처를 효과적으로 치유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동반돼야 할 구체적 행동을 실천하는 이곳 본당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교황은 지난 봄 바티칸에서 원주민 대표단을 만날 때부터 염원한 화해의 여정을 예수성심성당의 신자들이 이미 시작했다며, 많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자선활동에 대해서도 감사를 전했다. 이어 ‘화해(riconciliazione)’는 ‘교회(Chiesa)’와 동의어라며, ‘다시 불러 모으다(fare di nuovo un concilio)’라는 화해의 어원적 의미를 회복하라고 초대했다. 따라서 교황은 교회가 “모든 이를 위한 집”이 돼야 한다고, 연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했다.

“이곳은 교회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모든 이를 위한 열린 집, 모든 이를 포용하는 집입니다. 손님을 맞이하고 환대하는 하느님 자녀들이 모인 가정, 토착문화의 전형적인 가치와의 조화, 이러한 모습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과거의 사건이나 개인적 삶의 상황과 관계없이 모든 이가 환영받는다고 느끼는 곳이 돼야 합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몇 시간 전 매스쿼치스에서 원주민들이 겪은 악에 대해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구한 교황은 해를 끼치는 많은 일의 근원에 “가라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교육이라는 사명을 인도하는 정신이 무엇인지 분명히 설명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열등감을 조장하고, 고유한 문화적·영적 정체성을 지닌 원주민들과 그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들의 문화적 뿌리를 뽑아버리고, 편파적이고 차별적인 태도를 부추기는 동화정책과 해방정책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교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이뤄졌습니다. 교육은 언제나 사람들 안에 이미 존재하는 재능을 계발하고 존중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기존에 만들어진 틀에 끼워 맞추려는 행위는 교육이 아니며, 또한 교육이 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육은 우리가 함께 삶의 신비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이어 교황은 원고에 없지만 즉흥적으로 이번 사도 순방이 가능하도록 힘쓴 캐나다 주교단에게 특별한 감사를 덧붙였다. 교황은 “일치를 이루는 주교회의는 위대한 일을 하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했다.

예수성심성당의 병자들을 축복하는 교황
예수성심성당의 병자들을 축복하는 교황

화해를 이루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황은 예수성심성당 제대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나무둥치가 가지를 뻗어 제대를 떠받치고 있었다. ‘나무’는 땅과 뿌리에 생명을 주는 상징으로 원주민들에게 소중한 주제이기도 하다. 교황은 전례적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제대 위에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화해시키시고, 모든 피조물을 껴안으신다고 설명했다. 교황은 지난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캐나다 순방 당시 강론을 인용하면서 우주를 감싸고 만물을 화해시키는 예수님의 그리스도론에 적용된 핵심 상징들도 덧붙였다. 화해라는 작업은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청해야 할 은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해는 외적인 평화협정이나 당사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일종의 타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위로부터 강제로 부과된 것도, 타인을 동화시켜 얻은 평온함도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두 주체를 함께 있게 하심으로써 화해하게 하셨다며, 그리하여 일치를 이룬 한 몸, 곧 단 하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나요? 십자가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에페 2,14 참조). 십자가 위에서 우리 가운데 화해를 이루도록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생명의 나무라고 즐겨 불렀습니다.”

“끔찍하게 고통받은 이들의 아픔을 상상하며”

교황은 지역 공동체,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증언해야 할 신자들로부터 원주민들이 겪은 악에 매우 깊이 공감했다. 대서양을 건너 가뜩이나 피곤한 상태에서 무릎까지 아픈 교황의 모습이 원주민들의 아픔을 여실히 드러냈다. 교회의 아픈 부분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교황의 담대함은 다음 연설 대목에서 다시 한번 잘 드러난다. 

“그 무엇도 침해된 존엄성, 악에 대한 체험, 배신당한 믿음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신앙인들의 부끄러움도 결코 지워져서는 안 됩니다. 다만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듣기 좋은 말이나 좋은 계획이 아니라 십자가를 주십니다. 십자가는 손과 발이 못으로 꿰뚫리고 머리가 가시에 박히는,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길입니다. 곧, 그리스도를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배반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입니다. 많은 기숙학교 학생들 가운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 그리고 우리 자신과 화해하고, 과거와 화해하고, 부당하게 겪은 고통과 아픈 기억, 어떤 인간적 위로로도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와 화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눈을 들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의 제단에서 평화를 구해야 합니다.”

퍼스트 네이션 원주민 예수성심성당 본당 공동체
퍼스트 네이션 원주민 예수성심성당 본당 공동체

주님께서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교황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인용하며, 교회가 “화해를 이룬 살아있는 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교회가 이 지역의 원주민에 대한 차별을 부추겼던 태도의 근원에 세속적인 유혹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태도는 종교적 관점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을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더 편리한 방법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시고, 억압하지 않으시며, 강압적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고, 해방시키시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이를 지배하는 이들, 화해의 복음과 개종강요를 혼동하는 이들을 당신의 영으로 돕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선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역사 안에서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지요! 하느님께서는 소박하고 겸손하게 당신을 드러내시지만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강요하고 짐을 지우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능력과 겉모습을 드러내 보이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이 세상의 유혹입니다.”

“더 이상 교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교황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자유와 사랑 안에서 선포되셔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우리가 만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모든 사람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아야 할 형제자매, 사랑받으셔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가 화해의 살아있는 몸이 되길 바랍니다!”

회칙 「Fratelli tutti」는 교황이 예수성심성당의 원주민인 퍼스트 네이션을 향해 전달한 이야기 안에서도 반향된다. 교황은 교회가 진정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교회는 우리가 스스로를 개인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서로 형제자매임을 인식하는 자리입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상대방의 역사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성령을 기쁘게 해 드리시는 어우러짐의 신비를 받아들여 상처 입은 기억의 치유를 촉진하는 자리입니다.”

교회는 주입시켜야 할 개념이 아닙니다

교황은 화해가 기도와 공유하는 역사의 열매라며, 나날이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라고 말했다. 이 여정은 연민과 온유한 사랑으로 이뤄져 있다. 

“이것이 그 방법입니다. 곧, 남을 위해 대신 결정하거나 정해진 틀 안에 모든 사람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형제자매 앞에 우리 자신을 두고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현실이 생각을 넘어서는 자리가 돼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주입시키려는 개념이나 계명의 총체가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 열려 있는 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문이 열려 있는 성전이며, 성령의 살아있는 성전인 우리 모두가 서로 만나고 섬기고 화해하는 자리가 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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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7월 2022, 0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