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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을 생각한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요”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복수하거나 앙심을 품는 게 아니라, 온유함으로 나의 다른 뺨을 내밀고 원수의 마음에 균열을 내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월 20일 연중 제7주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이 같이 강조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은 “증오에 굴복하지 말고 더 멀리, 훨씬 더 나아가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며, 이는 오직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통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오늘날 세상에서 항상 평화의 일꾼이 되라고 강력히 호소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전례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삶의 기본적인 지침 몇 가지를 제시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시험대가 되는 어려운 상황을 언급하십니다. 우리에게 적대적이고 원수인 사람, 항상 우리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애쓰는 사람 앞에 우리를 서게 만드는 상황 말입니다. 이러한 경우 예수님의 제자는 본능이나 증오에 굴복하지 말고 더 멀리, 훨씬 더 나아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본능과 증오를 넘어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어라”(루카 6,27 참조) 하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훨씬 더 구체적인 말씀도 하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어라”(29절 참조).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 주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나요? 고압적인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않으면, 모든 횡포가 거리낌 없이 행사됩니다. 이는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로 ‘불가능한’ 일, 더 나아가 ‘부당한’ 일을 요구하실까요? 정말 그러실까요?

우리가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 때” 느끼는 ‘부당함’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떠올려 봅시다. 수난을 받으시는 동안, 대사제 앞에서 부당한 신문을 받으실 때, 어느 순간 성전 경비병 중 한 사람에게 뺨을 맞으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나요? 그를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경비병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 그분께서는 부당한 대우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십니다. 다른 뺨을 내민다는 것은 불의에 굴복하고 침묵으로 견디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질문을 통해 부당함을 표명하십니다. 하지만 분노 없이, 폭력 없이, 오히려 ‘온화하게’ 표명하십니다. 논쟁을 촉발시키려 하지 않으시고, ‘분노를 가라앉히려’ 하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곧, 증오와 불의를 함께 꺼트리면서 죄 지은 형제를 회복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이는 쉬운 행동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뺨을 내미는 것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당신께서 뺨을 맞으신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응답입니다. 다른 뺨을 내미는 것은 패자가 물러나는 게 아니라, 내면의 힘이 더 큰 사람의 행동입니다. 적이 가진 증오가 얼마나 불합리한지 드러내며, 적의 마음에 균열을 내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태도, 곧 다른 뺨을 내미는 것은 계산된 행동이나 증오의 행동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 받는 과분하고 무상적인 사랑은 모든 복수를 거부하고, 마음속에 당신과 비슷한 행동을 실천하는 방식을 낳습니다. 우리는 복수에 익숙합니다. “네가 나에게 이렇게 했으니, 나도 너에게 그렇게 하겠다”거나 마음속에 이런 앙심을 품는 데 익숙합니다. 앙심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그 사람을 파멸시킵니다.

또 다른 반대의 이유를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이 자기 원수를 사랑하기에 이르는 것이 ‘가능한가’?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단순히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무언가를 요구하실 때, 주님께서 사랑을 주길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먼저 주시지 않은 것을 절대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나에게 말씀하실 때,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을 나에게 주시려 하십니다. 그러한 역량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 없겠지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을 주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주님, “명하시는 바를 주시옵소서. 원하시는 바를 명하소서”(『고백록』, 제10권 29.40). 이미 그것을 저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우리에게 주시며 기뻐하실까요?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물건이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영을 통해 우리는 선으로 악에 대응할 수 있고,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행동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부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전쟁을 하려고 생각한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릅니다! 몹시 슬픈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초대를 따라 살고자 노력하나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각자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받는 일은 흔합니다. 그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 앙금이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망 곁에, 재판 중에 뺨을 맞으신 다음 온유한 모습을 보이셨던 예수님을 나란히 두도록 합시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활동하시도록 청합시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루카 6,28 참조). 사람들이 우리에게 피해를 입힐 때, 우리는 곧장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이를 말하고 스스로를 피해자로 느낍니다. 잠시 멈추어 그 사람을 위해 주님께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도와주시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러한 원망의 감정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악을 선으로 바꾸는 첫걸음입니다. 기도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 특히 우리를 적대시하고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평화의 일꾼이 될 수 있도록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도우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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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월 2022, 13:09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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