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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자 마리아의 배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월 1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을 통해 마리아의 배필인 요셉 성인에 대한 교리 교육을 이어갔다.

번역 김호열 신부

성 요셉에 대한 교리 교육

3. 의로운 사람이자 마리아의 배필인 성 요셉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요셉 성인의 모습에 대한 교리 교육의 여정을 이어갑시다. 오늘은 요셉 성인이 “의로운” 사람이며 “마리아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깊이 살펴봄으로써 모든 약혼자들과 신혼부부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예술과 다양한 예배 장소에 영향을 미친 요셉 성인과 관련된 많은 사건들이 성경의 정경(正經, canon)이 아닌 외경(外經, Apocrypha)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이 글들은 당시의 그리스도교 신심이 만들어낸 이야기들로, 그리스도인 신앙과 삶에 필수적인 모든 것을 제공하는 성경의 정경에 포함된 복음서들의 서사적 간극을 채우고자 하는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곧, 마태오 복음서는 요셉 성인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외경 복음서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외경 복음서들은 나쁘거나 해로운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훌륭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에 포함된 복음서들이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중에는 요셉 성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정의한 마태오 복음사가가 있습니다. 마태오가 말한 것을 들어봅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8-19). 약혼한 남자들은 약혼녀가 불성실하거나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녀를 고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러한 여성들은 돌을 던져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의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아니야.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조용히 있으면 돼.”

마리아에 대한 요셉 성인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고대 이스라엘의 혼인 풍습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혼인은 두 단계의 정확한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공식적인 약혼입니다. 이는 새로운 상황과 관련된 상황으로, 특별히 여성은 약혼 후 1년 동안 본가에 계속 지내지만 사실상 약혼자의 “아내”로 간주되었습니다. 아직 함께 살지는 않지만 이미 누군가의 아내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신랑 집으로 가는 축제 행렬이 진행되는데, 이로써 혼인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신부의 친구들이 신부를 동행하며 함께 신랑 집으로 갔습니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는 측면이 마리아를 간통죄로 고발하는 위험에 노출시켰습니다. 고대 율법에 따르면 이 죄를 지은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했습니다(신명 22,20-21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유다인 관습에서는 율법의 온건한 해석이 받아들여져 돌을 던져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에게 민사 및 형사상의 책임이 따르는 파혼만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복음서는 요셉 성인이 모든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처럼 율법에 순종했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이 마음속에 간직한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마리아에 대한 신뢰가 율법을 준수하면서도 신부의 명예를 지키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모욕하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게,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재판이나 보복 없이 비밀 유지의 길을 선택합니다. 요셉 성인이 얼마나 거룩한지요! 우리는 소문이나 좋지 않은 소식이 조금이라도 들리면 곧장 뒷담화하러 달려갑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침묵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즉시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하느님의 음성이 요셉 성인의 식별에 개입합니다. 꿈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의로움보다 더 큰 의미를 드러내십니다. 우리 각자가 의로운 삶을 가꾸는 동시에 항상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우리의 지평을 넓히고, 삶의 상황을 더 넓고 다른 관점에서 숙고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갇혀 있다고 느낍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세요!”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좋지 않은 일의 포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극적으로 보이는 삶의 어떤 상황 앞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형태를 취하고 우리를 괴롭힌 고통의 의미를 밝혀줍니다. 여기서 유혹은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일만 생각하며 고통 속에 우리 자신을 가두는 것입니다. 이는 좋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를 슬픔과 괴로움으로 이끕니다. 쓰라린 마음은 몹시 나쁩니다. 

복음에 나오는 이 이야기의 세부사항에 잠시 멈춰 묵상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지점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약혼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삶과 미래에 대한 꿈과 기대를 키워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인생에 개입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으나 두 사람 모두 눈앞에 놓인 현실에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사랑과 애정의 관계에서는 사랑에 빠지는 논리에서 성숙한 사랑의 논리로 나아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것에서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혼부부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첫 단계는 종종 현실이나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상상에 빠져들게 하는 어떤 매력, 곧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단계입니다. 하지만 부푼 기대와 함께 사랑에 빠지는 단계가 끝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때가 진정한 사랑이 시작하는 때입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삶이 우리의 생각과 일치하기를 기대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요셉 성인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이유입니다. 그는 “내막을 잘 알면서도(a occhi aperti)” 마리아를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모든 위험을 감수하며 그렇게 했다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율법학자들이 간음과 관련하여 예수님을 힐난하는 내용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그들은 마리아가 어떻게 임신한 채로 남아 있는지 알았고, 예수님의 어머니를 욕되게 만들려 했습니다. 제게는 이 구절이 복음서 중에서 가장 저속하고 악마적인 구절입니다. 요셉 성인이 감수했던 위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줍니다. 곧, 주어지는 대로 삶을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기에 개입하셨는가?’ ‘나는 받아들이겠다.’ 요셉 성인은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명령한 대로 했습니다.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마태 1,24-25). 그리스도인 약혼자들은 사랑에 빠지는 논리에서 성숙한 사랑의 논리로 나아갈 용기가 있는 이러한 사랑을 증거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는 생명을 가두는 대신 사랑을 강화하여 시간이 주는 시련에 직면해도 견딜 수 있게 하는 어려운 선택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삶을 통틀어 발전하고 나날이 성숙합니다. 약혼 기간 동안의 사랑은 다소 –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 낭만적인 사랑입니다. 여러분 모두 겪어 보셨겠지만, 그 이후에 성숙한 사랑이 시작됩니다. 하루하루를 살고, 일하고, 자녀들이 생기면서 그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낭만적인 사랑은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만 성숙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부님, 가끔 저희는 다툽니다. (…)” 그것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지금까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입니다. “말다툼도 안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말다툼을 할 수 있죠. “신부님, 저희는 때때로 언성을 높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접시가 날아가기도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혼인생활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말을 주의 깊게 들으십시오. 화해하지 않고 하루를 끝내지 마십시오. ‘저희는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오, 하느님. 저는 상대방에게 끔찍한 말을 했습니다. 나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루가 저물고 있으니 저는 배우자와 화해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아십니까? 냉전의 다음날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다음날부터 전쟁을 치르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니 자기 전에 화해하십시오. “하지만 신부님, 부부싸움 이후 어떻게 말해야 화해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쉽습니다. 이렇게 하면 [교황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진다] 벌써 화해한 것입니다. [청중: 박수] 항상 기억하십시오. 화해하지 않고 하루를 끝내면 안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혼인생활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에서 성숙한 사랑으로 가는 길은 힘든 선택이지만,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도 요셉 성인께 드리는 기도로 교리 교육을 마무리합시다.

성 요셉이시여, 

당신께서는 마리아를 자유로이 사랑하시고,

현실에 양보하기 위해 당신의 생각을 버리기로 택하셨으니,

저희가 하느님의 놀라우심에 마음을 열게 하시고,

저희 삶이 저희를 지키는 데 있어 예기치 못한 사건이 아니라 

참 기쁨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 신비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모든 그리스도인 약혼자들에게 기쁨과 사랑의 급진성을 얻어 주시고,

자비와 용서만이 사랑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항상 깨닫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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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12월 2021,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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