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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작은 교회는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형제애를 함양하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이 12월 4일 그리스 성 디오니시오 주교좌성당에서 주교, 사제, 남녀 수도자, 교리 교사들을 만나 연설했다. 교황은 “여러분의 작음을 축복으로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당부하는 한편, 작은 교회는 “정복과 승리의 정신, 눈에 띄는 교세나 세속적인 웅장함”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복음화란 빈 그릇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이미 이루기 시작하신 것을 밝히는 일”이라며,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지 말고 가톨릭 신자들과 정교회 신자들 간의 일치를 위해 일하라고 초대했다.

Salvatore Cernuzio / 번역 이창욱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양의 토대가 세워져 있는” 그리스의 사도 순방 첫날인 12월 4일 주교, 사제, 남녀 수도자, 교리 교사들을 만났다. 교황은 이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면서 신뢰와 확신 그리고 환대를 강조했다. 먼저 신뢰와 확신은 “작은 교회”가 되는 문제로, 작은 교회란 “정복의 정신”이나 “세속적인 웅장함”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또한 환대는 가톨릭 신자와 정교회 신자가 “서로 귀를 기울이고” “형제애의 ‘신비(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87항 참조)’를 함양하며”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앞서 교황은 예로니무스 2세와의 만남에서 이익과 권력을 좇는 행동과 선택이 “친교를 시들게” 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교황은 그러한 결과인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는 과거사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번 만남은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오 주교좌성당에서 이뤄졌다. 성당 내부의 벽에는 복음의 장면들이 그려져 있었다. 성당 입구에서 한 사제가 나무 십자고상을 들고 교황을 맞이하자 교황은 머리를 숙여 십자고상에 입을 맞췄다. 다른 젊은 사제가 교황에게 성수채와 성수 그릇을 가져오자 교황은 짧게 성수를 뿌리는 예식을 마친 후 성당 중앙제대로 이동했다. 큰 박수소리와 그리스 국기가 중앙제대로 이동하는 교황의 발걸음을 맞이했다.

우리는 그리스의 자녀들이며 그리스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전임 아테네대교구장 겸 전임 그리스 주교회의 의장 세바스티아노스 로솔라토스(Sevastianos Rossolatos) 대주교의 인사말로 만남이 시작됐다. 수녀 한 명과 평신도 한 명의 증언이 뒤를 이었다. 교황은 “칼레스페라(Καλησπέρα)”, 곧 “안녕하세요”라는 저녁인사로 연설을 시작하며 “인류의 유산”이자 “선물”인 그리스에 올 수 있어 감사하고 기쁘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의 자녀들이며 그리스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 문학, 철학, 예술이 발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인간 실존에 대한 수많은 단면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인생, 사랑, 고통, 죽음에 관한 많은 내적 물음에도 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솔라토스 대주교의 인사말을 듣는 교황
로솔라토스 대주교의 인사말을 듣는 교황

사도 바오로의 모범

교황은 이 풍요로운 유산의 바탕에서 그리스도교 초기에 “신앙의 토착화를 위한 ‘실험실’”이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이어 사도 바오로가 초기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문화의 만남을 바로 이곳 아테네에서 시작하며 “두 세계”를 종합했다고 말했다. 교황은 “현재 우리의 ‘믿음의 토착화’에 유익한” 사도의 두 가지 태도를 통해 오늘날 교회 여정의 방향을 잡도록 초대했다. 교황이 제시한 첫 번째 태도는 ‘신뢰’다. 사도 바오로가 설교할 때 일부 철학자들은 그를 “떠버리”(사도 17,18)로 부르고, 그를 궁지로 몰아넣으며, 그다지 달갑지 않은 손님으로 대했다. 요컨대, 그는 “승리의 순간”을 살지 못했다.

“우리 역시 작은 공동체가 되는 것, 혹은 언제나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움직이는 힘없는 교회가 되는 것에 지치고 때론 좌절감을 느낍니다.”

교황은 사도 바오로의 아테네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고 초대했다. 바오로는 혼자이고 소수에 불과하며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낙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선교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교황은 설명했다. “사도 바오로는 불평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 불평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 습관이나 반복되는 삶보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라는 불확실성을 더 선호하며 확신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사도의 태도입니다.” 

승리주의 없는 작은 교회

교황은 이 같은 신뢰와 확신이 그리스 가톨릭 교회에 퍼지기를 원했다. “작은 교회가 되는 것은 우리를 복음의 웅변적인 표징이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표징으로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택하시고 겸손한 이들의 소박한 행동으로 역사를 바꾸십니다.”

“교회로서 우리는 정복과 승리의 정신, 눈에 띄는 교세나 세속적인 웅장함을 요구받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위험합니다. 승리주의의 유혹입니다.”

교황은 “여러분의 작음을 축복으로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당부했다. “소수가 된다는 것은 – 전 세계를 통틀어 교회는 소수입니다 –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걸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 길은 바로 “케노시스(kenosis, 자기 비움), 낮춤, 겸손”의 길이다.

그리스 주교단과 인사하는 교황
그리스 주교단과 인사하는 교황

복음화는 빈 그릇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황은 이러한 정신과 함께 절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열정”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두 번째 태도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제시했다. “받아들이는 태도란 다른 사람의 공간이나 삶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존의 토양에 기쁜 소식의 씨앗을 뿌리려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도달하기에 앞서 하느님께서 이미 그들의 마음에 심으신 씨앗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씨앗을 뿌리십니다. 복음화란 빈 그릇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이미 이루기 시작하신 것을 밝히는 일입니다.”

교황은 사도 바오로가 아레오파고스에서 “여러분은 모든 것을 잘못 알고 있다”거나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진리를 가르치겠다”고 말하지 않고,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적 정신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대화 상대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종교적 감수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교황은 사도 바오로가 “강요”하지 않고 “제안”했다고 역설했다. 이어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방식”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예수님의 온유하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친교를 이루려는 열망

교황은 “오늘날 우리도 받아들이는 태도, 환대의 방식, 인간·문화·종교적 차이 속에서도 친교를 이루려는 열망으로 타오르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 정교회 신자, 다른 종파의 형제자매 등 전체를 위한 열정을 키워 서로가 서로의 말을 경청하고, 꿈을 꾸며 함께 일하고, 형제애의 ‘신비’를 함양하는 것이 우리의 도전과제입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연설을 마무리했다. “이러한 환대하는 대화의 길에서 과거사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지만, 오늘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입시다!” 이어 그리스어로 다음과 같이 인사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시길 빕니다!”

교황은 주교좌성당에서의 만남을 가진 후 다음 장소로 이동하던 중,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지날 때 타고 가던 차량을 잠시 멈춰 세우고 아크로폴리스를 보며 감탄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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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12월 2021, 2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