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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을 경계합시다.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은 하느님을 찾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월 7일 연중 제32주일 삼종기도를 통해 이날 복음에 비추어 율법 학자들의 태도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쳤던 가난한 과부의 태도를 묵상했다. 교황은 과부의 행동이 “외적 허식 없이 내적으로 진실한 믿음,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한 겸손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복음에 묘사된 장면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고 계셨습니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거룩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시고, 율법 학자들이 얼마나 주목받고 인사받기를 즐기며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즐기는지 지켜보십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마르 12,40).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장면을 흘끗 쳐다보십니다. 권력자들에게 착취를 당한 이들 가운데 하나인 가난한 과부가 성전의 헌금함에 “생활비를 모두 다”(마르 12,44) 넣는 장면입니다. 복음은 그 과부가 가진 것을 모두 다 헌금함에 넣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이 극명한 대조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부자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남은 돈을 넣었지만, 가난한 여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적지만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인간의 태도에 관한 두 가지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요약하는 것은 바로 이 “바라보다(guardare)”라는 동사입니다. 율법 학자들처럼 이중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주의해야(guardarci)”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그 과부를 모델로 삼기 위해 그녀를 “보아야(guardarla)” 합니다. 이 점에 관해 묵상합시다. 곧 ‘위선자들을 조심하고(guardarsi)’ 또 ‘가난한 과부를 보는 것(guardare)’입니다.

먼저 ‘위선자들을 조심해야(guardarsi)’ 합니다. 다시 말해 삶이 겉치레와 ‘보여 주기 식 예배’에 토대를 두지 않도록,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꾸미는 데 급급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이익 때문에 믿음을 굽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허영을 덮어버리고,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남용하면서 자신들의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많은 지역에서, 많은 곳에서, 성직중심주의(clericalismo)를 봅니다. 이 성직중심주의는 가난한 이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착취하고, “그들을 두드려 패고(bastonarli)”, 스스로 완벽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직중심주의의 악입니다.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 교회와 사회에 대한 경고입니다. 절대 자신의 역할을 이용하여 남을 짓밟지 말고, 절대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서 이득을 취하지 마십시오! 깨어 있으십시오. 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본질을 잃어버리고 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겉모습에 안주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는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감사하다는 소리를 듣고 만족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하느님과 이웃, 특히 가장 약한 이들에게 봉사하기를 원하는가? 영혼의 위험한 질병인 마음의 거짓, 위선을 경계합시다! 위선(ipocrisia)은 이중으로 생각하는 것, 이중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 자체가 말하는 것처럼, “아래에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보여주면서 “ipo(~아래에)”, 곧 아래에서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중적입니다. 이중적인 영혼을 가진 사람들, 영혼의 이중성을 말합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를 바라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헌금을 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넣고 생활비조차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이 여인의 상황을 말씀하셨습니다. 돈의 속박에서 거룩함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른 곳에서 이를 언급하셨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이지요. 하느님을 섬기든지 – 여기서 우리는 “혹은 악마를 섬기든지”라고 말씀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아닙니다 – 하느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오직 한 주인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가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던 것을 칭찬하십니다.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그녀는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작은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큰 믿음은 내어놓는 이의 기쁨을 배가시켜 줍니다. 이 사화는 엘리야 예언자가 만난 다른 과부의 사화도 생각하게 합니다. 그 과부는 가지고 있던 마지막 밀가루 한 줌과 마지막 기름으로 빵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시오”라고 말하자, 그녀는 그에게 빵을 만들어 주었고, 그러자 밀가루가 절대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1열왕 17,9-16 참조). 주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의 관대함 앞에서, 그 관대함을 넘어 가십니다. 그분께서는 더 관대하십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탐욕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신앙의 스승으로 제시하십니다. 그 과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려고 성전에 간 게 아니며,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지도, 자기 신앙을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온 마음으로, 관대하고 거저 베푸는 마음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과부의 동전 두 닢은 부자들의 큰돈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를 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겉모습으로 사는 게 아니라 조건 없는 신뢰로 살아가는 신앙, 진심으로 하느님께 헌신하는 삶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과부에게서 외적 허식 없이 내적으로 진실한 믿음,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한 겸손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배웁니다. 

이제 겸손하고 투명한 마음으로 당신의 온 일생을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을 위한 선물로 만드신 동정 마리아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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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11월 2021, 22:57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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