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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믿음은 불완전하고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10일 연중 제28주일 삼종기도 훈화에서 이날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만남을 설명했다. 이 사화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믿음에 관한 시험”이다. 혹시 우리는 “의무적인 관계”나 “기계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사랑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며 그 믿음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가? 우리는 주님께 매료되어 “자유롭고도 거침없게” 응답할 수 있는가?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복음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던”(마르 10,22 참조) “부자 청년”(마태 19,20-22 참조)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을 들려줍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을 모릅니다. 마르코 복음은 실제로 그 사람의 나이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라고만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사람 안에서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걸 암시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그 사람의 만남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저는 이 사화를 읽으면서 제 믿음에 대한 시험을 치릅니다.

그 사람은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라는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그가 사용하는 동사에 유의합시다. ‘받으려면’과 ‘해야 하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종교적 신념입니다. 곧, 의무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일 말입니다. “나는 내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행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하느님과 상업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당신이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do ut des)’는 것이죠. 하지만 믿음이란 차갑고 기계적인 예식, “받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유와 사랑에 관한 문제입니다. 믿음은 자유에 관한 문제이고, 사랑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시험입니다. 곧, 나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 만일 그것이 주로 의무나 협상카드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길을 이탈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의무가 아니라 ‘베풀어진 것(선물)’이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상업적이고 기계적인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상업적이고 기계적인 믿음은 아버지가 아니라 통제하시는 하느님, 셈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그릇된 이미지를 암시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인생에서 이러한 “상업적인” 믿음의 관계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이것을 주시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행한다는 식입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참된 얼굴을 제시하시면서 ‘그 사람’을 도우십니다. 실제로 성경 본문은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마르 10,21 참조)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어디서 나오고 또 거듭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곧, 믿음은 의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거나 지불해야 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맞아들이는 사랑의 ‘눈길’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길에 토대를 둔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처럼 아름다운 삶이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지쳐 있습니까? 활기를 되찾고 싶습니까? 하느님의 눈길을 찾으십시오. 성체조배를 하고, 고해성사에서 용서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앞에 머무십시오. 요컨대, 주님께서 사랑하시도록 여러분 자신을 내어 맡기십시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곧, 아버지이신 그분께서 사랑하시도록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겁니다.

그 사람의 질문과 그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길 이후,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그 부자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내어주는 것, 거저 주는 것이 부족했습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이는 어쩌면 우리에게도 부족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종종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최소한도로 행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능한 한 최대한도를 행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계명들, 약간의 기도, 그런 류의 의무들로 만족하는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자극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무에서 내어주는 것으로 넘어가는 이러한 이동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떠올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마르 10,19 참조) 등을 언급하시고,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참조)라는 긍정적인 제안을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 사랑의 ‘예’이기 때문에, 믿음은 ‘아니오(안 된다)’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베풀지 않는 믿음,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믿음은 불완전한 믿음, 약한 믿음, 병든 믿음입니다. 영양분은 풍부하지만 풍미가 부족한 음식 혹은 비교적 잘 경기에 임했지만 한 골도 넣지 못한 경기에 비길 수 있을 겁니다. 안 됩니다.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금”이 부족한 것입니다. 베풀지 않는 믿음,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믿음, 사랑의 실천이 없는 믿음은 결국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인격적으로 사랑스럽게 바라보셨음에도,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마르 10,22 참조) 집으로 떠나갔던 그 사람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내 신앙은 어디쯤 와 있는가? 나는 의무적인 관계처럼 기계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하느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가? 예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고 사랑하시도록 나를 내어 맡기며 그 믿음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예수님께서 바라보시고 사랑하시도록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께 매료되어 온 마음을 다해 자유롭고도 거침없게 응답할 수 있는가?”

하느님께 ‘예, 그러나 (…)’가 아니라 전적으로 ‘예’라고 말씀하신 동정 마리아께서 인생을 선물로 만드는 아름다움을 맛보도록 우리를 도우시길 빕니다. ‘예, 그러나 (…)’가 아니라 ‘예’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동정 성모님은 ‘예, 그러나 (…)’가 아닌 ‘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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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월 2021, 10:32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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