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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 기도로 모든 것을 청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 삼종기도를 통해 마르코 복음이 소개하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의 모습을 묵상하며, 그를 가리켜 “구체적이고 대담한” 믿음의 모범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삼종기도의 말미에 리비아 난민과 이주민을 위해 호소하며 전교주일을 기억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떠나시며 길가에 앉아 있던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의 눈을 고쳐주신 사화를 들려줍니다(마르 10,46-52 참조). 두 사람의 만남은 파스카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셨던 중요한 만남이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시력을 잃었지만 목소리는 잃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은 그의 외침을 성가시게 생각하며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8)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으시고 이내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바르티매오의 목소리를 전혀 성가시게 생각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을 알아채셨습니다. 오해와 책망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하느님의 마음을 두드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적의 근원이 있습니다. 실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48).

바르티매오의 믿음은 그의 기도에서 빛을 발합니다. 그 기도는 소심한 기도도 아니고 정형화된 기도도 아닙니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을 메시아로, 세상에 오실 왕으로 알아본 겁니다. 그런 다음 친밀하게 그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예수님.”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거리를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마음으로부터, 자신의 모든 극적인 삶을 담아 벗이신 하느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저 이런 기도를 바쳤던 겁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른 행인들에게 구걸한 것처럼 그분께 푼돈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에게 모든 것을 청합니다.’ 사람들에게는 푼돈을 구걸했지만,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는 모든 것을 청했습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의 모든 것에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는 호의를 청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자신을 위해, 자신의 삶을 위해 자비를 청했습니다. 이것은 사소한 요청이 아니라 자비, 곧 연민, 하느님의 자비, 그분의 온유한 사랑에 대한 부르짖음이기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본질을 말했고,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을 이루시며 그의 삶을 다시 피어나게 할 수 있으신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주님께 동냥을 청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드러냈습니다. 볼 수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심했던, 자신의 눈멂과 자신의 고통을 말입니다. 눈멂은 ‘빙산’의 일각이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상처, 굴욕, 산산이 조각난 꿈, 과오, 후회 등도 있었을 겁니다. 그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가 하느님께 은총을 청할 때, 우리 자신의 역사, 상처, 굴욕, 산산이 조각난 꿈, 과오, 후회를 담아 기도하나요?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오늘 우리도 이 기도를 바칩시다. 그리고 이렇게 자문해 봅시다. “나의 기도는 어떠한가?” 우리 각자 이렇게 물어보도록 합시다. “나의 기도는 어떠한가?” ‘지나가시는 주님을’ “붙잡을 줄” 알았던 바르티매오의 기도처럼 예의 바른 끈질김을 담은 대담한 기도인가? 아니면 생각날 때마다 가끔 그분께 형식적인 인사를 드리며 자족하는 기도인가? 그런 뜨뜻미지근한 기도는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자문해 봅시다. 나의 기도는 주님 앞에 마음을 송두리째 벗겨내어 드러내는 “본질적인” 기도인가? 아니면 감정도 없고 마음도 없이 의례적으로 행하는 피상적이고 무기력한 기도인가? 믿음이 살아있을 때,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옵니다. 잔돈을 구걸하지 않고, 순간의 필요로 축소되지 않는 기도 말입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를 잊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서 끈질기게,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은총과 당신의 기쁨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기를 고대하시지만, 소심함이나 혹은 게으름이나 불신 때문에, 불행히도 그분께 거리를 두고 있는 건 우리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중 많은 이들은 기도할 때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습니다. 제가 목격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아홉 살짜리 딸이 오늘밤을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들의 말을 들었던 아빠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딸은 병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버스를 타고 60킬로미터 떨어진 성모 성지로 갔습니다. 문이 닫혀 있자 그는 문에 매달린 채 밤을 지새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주님, 제 딸에게 생명을 주십시오!” 그는 마음을 다해 부르짖었습니다. 밤새도록 하느님께 울부짖고, 성모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가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딸이 죽었구나.” 그런데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요.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군요. 의사들이 참 이상한 일이라고 말해요. 딸은 다 나은 것 같아요.” 모든 것을 청했던 그 사람의 부르짖음을 주님께서 들으셨고,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 일은 그냥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일은 어떤 교구에서 제가 직접 봤던 사건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이런 용기가 있나요? 위대한 스승, 위대한 기도의 스승 바르티매오처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께 모든 것을 청합시다. 바르티매오가 구체적이고, 끈질기고, 대담한 믿음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길 빕니다. 언제나 기도하시는 동정 성모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모든 기도를 귀 담아 들으신다는 믿음 안에서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의지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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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0월 2021, 00:32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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