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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의 논리에서 연민의 논리로 넘어가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17일 연중 제29주일 삼종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 애쓰기보다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섬기려고 노력할 것을 권고했다. “한 달 내내 일해도 충분한 음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황은 삼종기도에 앞서 이날 주일미사 중 오랜 기간 교황전례원장을 지냈던 귀도 마리니 몬시뇰과 지난 9월 8일 교황청 성직자성 차관으로 임명된 안드레스 가브리엘 페라다 모레이라 몬시뇰의 주교 서품식을 거행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복음(마르 10,35-45 참조)은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마치 “총리들”이나 그와 비슷한 직책처럼 주님 곁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하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인내심을 갖고 제자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십니다. 곧, 참된 영광이란 자기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위로 들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얼마 있지 않아 그곳 예루살렘에서 받으시게 될 세례, 다시 말해 십자가를 사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세례”라는 말은 “물에 잠김(immersione)”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면서, 당신 수난을 통해 죽음에 잠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영광, 하느님의 영광은 지배하려는 권력이 아니라 섬기는 사랑입니다. 통치를 바라는 권력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봉사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 여러분은 섬김의 길로 나아가야 하고,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논리 앞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드러나기(emergere)’를 바라고 예수님께서는 ‘침잠하기(immergersi)’를 원하십니다. 이 두 동사에 관해 잠시 묵상해 봅시다. 첫 번째는 ‘드러나다’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늘 유혹을 받는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합니다. 곧, 관계를 비롯해 만사를 우리의 야망을 기르기 위해, 성공의 계단을 오르기 위해, 중요한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개인적 특혜의 추구는 ‘정신의 병폐’입니다. 비록 좋은 의도를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 가면을 씁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선행을 하거나 좋은 강론을 하더라도, 사실 그 이면에서 우리가 단지 우리 자신과 우리 주장만 추구할 때, 다시 말해 우리를 내세우고, 더 높이 올라가려 할 때입니다. (...) 우리는 교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자주, 섬기는 자들이 돼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높이 오르려 하고, 더 앞서 나가려 하는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마음의 참된 지향을 검증하고, 다음과 같이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나는 이 일을, 이 책임을 끌고 나가는가? 봉사를 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유명해지고, 칭송을 듣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인가?” 이러한 세속적 논리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논리를 대조시키십니다. 다른 이들 위로 자기 자신을 들어올리는 대신, 그들을 섬기기 위해 발판으로 내려가고, 다른 이들보다 더 부각되기보다 다른 이들의 삶 안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음식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는 카리타스의 활동이 이탈리아 공영방송 라이(Rai)의 프로그램 “당신의 모상대로(A sua immagine)”에 소개된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이들의 기근을 염려하는 것,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많고, 특히 코로나19 대유행 이후에는 더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낮춰 그들을 바라보고 섬겨야 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높이 오르려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동사는 ‘침잠하다(immergersi)’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침잠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침잠해야 합니까? 우리가 만나는 이의 삶에서, 연민을 통해서 침잠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카리타스의 봉사활동 안에서] 우리는 기아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굶주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합니까?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일용할 양식이 우리 눈앞에 있을 때, 한 달 내내 일해도 충분한 음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생각합니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잠겨들어야 하고,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백과사전의 통계자료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들도 사람입니다. ‘나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는가?’ 우리가 만나는 이의 삶을 가엾이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여러분에게, 우리 모두에게 행하신 것처럼,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상처입은 역사에 완전히 밑바닥까지 침잠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행동 방식을 발견합시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늘 높은 곳에 머물러 계시면서 우리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셨음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겸손하며, 땅에 떨어져 생명으로 이끄는 비처럼, 자신을 들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방향과 같은 방향을 어떻게 택하고, 드러내는 것에서 잠기는 것으로, 특혜의 사고방식, 세속적인 사고방식에서 섬김의 사고방식,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으로 어떻게 넘어갈 수 있습니까? 노력이 필요하지만, 노력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돕는 힘이 우리 내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바로 세례의 힘입니다. 우리 모두가 은총으로 받은 ‘예수님 안으로 침잠하는’ 힘입니다. 그 힘이 우리를 이끌고, 주님을 따르도록 우리를 부추기며, 우리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봉사에 임하게 합니다. 세례의 힘은 은총이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지피신 불, 타올라야 할 불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세례의 은총, 예수님 안에 잠김, 그분의 존재 방식을 새롭게 해 주시길 청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던 것처럼 종이 되기 위해, 더욱 더 종다운 종들이 되기 위해 말입니다.

이제 성모님께 기도합시다. 성모님께서는 비록 가장 높은 분이셨지만, 자신을 드러내려 애쓰지 않으시고 주님의 겸손한 종이 되셨으며, 예수님을 만나도록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우리를 위한 봉사에 완전히 잠기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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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0월 2021, 00:09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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