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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우리에게 떠올려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12일 부다페스트에서 약 1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제52차 세계성체대회를 마무리하기 위해 ‘스따시오 오르비스(Statio Orbis)’로 알려진 폐막미사를 거행했다. 이번 성체대회는 1938년 이후 헝가리에서 두 번째로 열렸다. 교황은 미사강론을 통해 “강력한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종”이신 하느님의 “놀라운 새로움”에 마음을 열라고 초대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성공을 향한 도움닫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섬으로써 시작합니다.”

번역 이창욱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제자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이 물음은 스승의 뒤를 따르는 여정에서 전환점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초심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가까웠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의 증인들이었으며, 그분의 가르침에 감동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따라갔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처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감탄’에서 ‘예수님을 본받음’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과정이 부족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각자를 몸소 바라보시면서 개별적으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나는 너에게 누구인가?” ‘나는 너에게 누구인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이 물음은 가톨릭 교리에서 나오는 정확한 답변을 요구할 뿐 아니라 개인적인 응답, 곧 삶의 응답을 요구합니다.

이 응답에서 ‘제자됨의 쇄신’이 나옵니다. 제자됨은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거쳐간 이 세 단계를 우리도 행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선포이고, 둘째는 예수님과 함께 식별하는 것이며, 셋째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여정입니다.

1. ‘예수님의 선포’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을 대변하는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불과 이 몇 마디로 모든 것을 말했고 그의 답변은 옳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마르 8,30) 명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철저히 금지하실까?’라는 물음이 생깁니다. 특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만 불충분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을 따라 거짓 메시아를 선포할 위험이 항상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순간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성, 우리가 성찬례에서 발견하는 정체성, 파스카를 통한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사명은 부활의 영광에서 절정에 이르겠지만, 십자가의 굴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그럴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다시 말해 성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닌”(1코린 2,6) 하느님의 지혜에 따른 전환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기다리는 십자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메시아 신분에 대해서 침묵을 명하십니다. 더욱이 복음사가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마르 8,31)는 가르침을 예수님께서 “명백히”(마르 8,32) 말씀하기 시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선포, 상식을 뒤엎는 선포 앞에서, 우리도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의 종보다는 강력한 메시아를 선호합니다. 성찬례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우리에게 떠올려주기 위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느님을 쪼개진 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을 내어주신 사랑으로 드러냅니다. 우리는 예식적인 요소를 더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쪼개지고, 나눠지며, 먹히는 빵의 단순함 안에 계십니다. 그분께서 거기에 계십니다. 거기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종이 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으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선포에 충격을 받는다면 우리에게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선포에 마음을 여는 사람은 두 번째 단계에도 마음을 엽니다.

2. ‘예수님과 함께 식별하기’입니다. 주님의 선포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반응은 전형적으로 인간적입니다. 십자가, 곧 고통의 전망이 나타나자마자 인간은 저항합니다. 방금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베드로 사도는 스승의 말씀에 분개하여 그분이 가시려는 길을 말리려 합니다. 십자가는 결코 유행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는 유행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내면을 치유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은혜 넘치는 내적싸움, 곧 “하느님의 사고방식에 따라 생각하는 것”과 “인간의 사고방식에 따라 생각하는 것” 사이의 극심한 갈등을 체험합니다. 한편에는 하느님의 논리, 곧 겸손한 사랑의 논리가 있습니다. 온갖 명령, 겉치레, 성과주의를 피하는 하느님의 길은 자기 자신의 희생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타인의 유익을 바랍니다.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사고방식에 따라 생각하는 논리”가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논리입니다. 영예와 특혜에 집착하고, 위신과 성공을 바라는 세속의 논리입니다. 세상에서는 눈에 띄고 힘 있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타인 앞에서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이 될 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현혹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제쳐두고 질책합니다(마르 8,32 참조). 방금 전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는데, 이제는 그분을 책망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마음 한구석으로 내몰고 주님을 “제쳐두면서”, 예수님의 논리를 따르지 않은 채 스스로를 교양 있는 신앙인으로 자처하며 우리의 길을 가는 일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이러한 내적싸움에서 우리를 동행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도들처럼 ‘당신의’ 편을 선택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편이 있고 세상 편이 있습니다. 차이점은 누가 신앙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참된 하느님과 우리 ‘자아’의 신 사이에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침묵 중에 다스리는 분과 우리의 원수들을 잠잠하게 하려고 힘으로 다스리는 거짓 신은 얼마나 거리가 먼지요! 오직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와, 세상이 치켜세우는 힘있고 승리하는 메시아들은 얼마나 다른지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뒤흔드십니다. 신앙을 선언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십자가와 성체 앞에서 우리의 신앙심을 정화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의 약함을 관상하기 위해 성체 앞에서 경배하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자주 잊혀지는 기도방식인 성체조배를 위해 시간을 내도록 합시다. 살아계신 빵 예수님께서 우리의 닫힌 마음을 낫게 하시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데 있어서 우리 마음을 열게 하시며, 엄격함과 지나친 자기 걱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시도록 맡겨드립시다. 또한 우리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된 노예근성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영감을 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세 번째 단계에 도달합니다.

3.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여정’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 8,33). 예수님께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강력한 명령을 통해 베드로 사도를 당신께로 다시 이끄십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무엇인가 명하실 때마다, 실제로 그분께서는 이미 그것을 주시려고 기꺼이 거기에 계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은총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성공을 향한 도움닫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섬으로써 시작합니다. 이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섬으로써 시작합니다. 탈중심화를 통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남으로써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참된 예수님’이 자신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계속 넘어지겠지만,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하느님의 얼굴을 한층 잘 알아볼 것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공허한 감탄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본받음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걷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깨달으며 예수님과 똑같은 신뢰를 갖고 삶에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마르 10,45 참조), 스승의 길과 똑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걷는다는 것은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만나기 위해 날마다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성찬례는 우리를 이 만남으로 이끌고, 우리가 한 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며, 타인을 위해 우리 자신을 기꺼이 쪼개도록 부추깁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찬례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깁시다. 성찬례가 여러분이 공경하는 용감하고 위대한 성인들을 변화시킨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스테파노 성인과 엘리사벳 성녀를 생각합니다. 그들처럼 작은 일에 만족하지 맙시다. 반복되는 예식에 의존하는 신앙에 머무르지 말고,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쪼개진 빵이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새로움에 마음을 엽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전할 것입니다.

이번 세계성체대회는 한 여정의 종착점이지만, 무엇보다 출발점이 돼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여정은 앞을 내다보고 은총의 전환점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처럼,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이 물음을 매일 던지라고 우리를 초대하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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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9월 2021, 0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