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 마음의 중심에 계시면 신앙이 성숙해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8월 1일 연중 제18주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우리가 아무런 계산 없이 거저 주는 마음으로 복음의 초대에 응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를 배불리는 물질적인 빵에만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맞아들입시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복음의 첫 장면(요한 6,24-35 참조)은 우리에게 카파르나움으로 향하는 몇 척의 배를 보여줍니다. 곧,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는 이를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찾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찾는 동기가 무엇인지 자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사람들은 실제로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목격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기적에 그쳤습니다. 물질적인 빵에 그쳤던 것입니다. 이 기적의 의미에 대해, 더 이상 뛰어넘지 못하고 그저 물질적인 빵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모두 첫 번째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주님을 찾는가? 나는 왜 주님을 찾는가? 내 신앙의 이유는 무엇이고, 우리 신앙의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에 대해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유혹들 가운데, 그 유혹들 가운데 우리가 ‘우상의 유혹’이라 부를 수 있는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유혹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용도와 소비를 위해 하느님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느님을 찾고, 우리 혼자 힘으로 얻지 못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느님을 찾고, 우리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찾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신앙은 피상적인 신앙이 될 뿐이고, –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 기적만 바라는 신앙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배를 불리기 위해 하느님을 찾고, 배가 부르면 그분을 잊어버립니다. 이 미성숙한 신앙의 중심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으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만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를 비롯하여 다른 많은 것들 (…) 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하느님의 마음에 보여드리는 일은 옳지만, 우리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어 행하시는 주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관대하며 무상입니다. 곧, 대가를 바라고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만일 대가를 바라고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리사욕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사리사욕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던진 두 번째 질문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이 질문은 마치 예수님에게서 도발을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찾는 일을 정화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의 필요만 생각하는 주술적 신앙에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신앙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를 맞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 바로 당신 자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는 종교적 신심 실천을 더하거나 특별한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님과의 사랑의 역사’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정화해 주실 분은 바로 그분입니다. 우리는 이를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사랑의 관계를 맺길 바라십니다. 우리가 받고 행하는 일들에 앞서, 사랑해야 할 그분이 계십니다. 이익의 논리나 계산의 논리를 뛰어넘는 주님과 맺는 관계가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관련해서 적용되지만, 우리의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특히 우리가 가장 먼저 우리의 필요를 충족하려 할 때, 우리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고 상황을 악용하는 위험에 빠집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람들을 이용하고 나중에 잊어버립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 이는 나쁜 일입니다. 사람 대신 이익을 중시하는 사회는 생명을 낳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복음의 초대는 바로 이것입니다. 곧, 우리를 배불리는 물질적인 빵에만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맞아들여 그분과의 우정에서 시작해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계산하지 말고 무상으로, 사람들을 이용하지 말고 거저 주는 자세로, 너그러움으로, 넓은 아량으로 하는 사랑 말입니다.

이제 당신 아드님과의 만남에 우리 마음을 여는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하느님과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역사를 사셨던 동정 성모님께 기도합시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01 8월 2021, 08:40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최근의 삼종기도와 부활 삼종기도

모두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