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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놀라우심에 마음을 여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7월 4일 연중 제14주일 삼종기도 전 훈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사람들로부터 예언자로 존경받지 못하고 거부당하신 사화를 설명했다. 교황은 그들이 “우리 가까이” 오신 하느님의 “강생의 스캔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며, 우리가 “습관의 안락과 편견의 횡포”를 따를 때 우리도 그들처럼 된다고 말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주일 복음(마르 6,1-6 참조)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의 불신에 관해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다른 마을들에서 설교하신 다음,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 성인과 함께 지내며 자라나셨던 나자렛에 다시 머무르십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많은 이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서로 묻습니다.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우리가 잘 아는 우리 이웃의 아들이 아닌가?”(마르 6,1-3 참조) 이러한 반응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는 대중들의 지혜가 담긴 속담이 되었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4절).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의 태도에 관해 잠시 살펴봅시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만, 사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과 알아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차이는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알 수 있고, 오해를 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에 대해 다른 이들이 말하는 내용을 믿을 수 있고, 어쩌면 가끔씩 그 사람을 동네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말하자면 일반적이고, 표면적인 것을 ‘아는 것’이지, 그 사람의 특별함을 ‘알아보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위험에 처합니다. 곧,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데, 최악의 경우는 그 사람에게 꼬리표를 붙이거나 우리의 편견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30년 전부터 그분을 알고 있고 그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우리가 자라는 걸 봤던 그 청년, 목수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불신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정말 누구신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겉모습에만 머물러 예수님의 새로움을 거부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습관의 안락’과 ‘편견의 횡포’가 우위를 점할 때, 새로움에 마음을 열고 놀라도록 자신을 맡기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습관으로, 편견으로 통제합니다. 변화를 위한 노력을 절대 하지 않으려고 종종 삶에서, 경험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서 단지 우리의 생각이나 틀에 상응하는 것만 찾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하느님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에게,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발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은 하느님과는 충분치 않습니다. 잘 새겨들으십시오. 새로움에 마음을 열지 않고, 특히 경탄하지 않고, 하느님의 놀라움에 마음을 열지 않으면, 신앙은 서서히 꺼져가서 하나의 습관, 사회적 습관이 되는 지루한 후렴구처럼 변합니다. 저는 ‘놀라움’이라는 단어를 말씀드렸습니다. 놀라움이 무엇입니까? 놀라움은 우리가 하느님과 만날 때 생깁니다. “저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놀라움을 느끼는 것을 우리는 복음에서 읽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곧, 놀라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그 만남이 습관적인 것이 아니라, 참되다는 보증서 같은 것입니다.

끝으로, 어째서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믿지 못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한마디로 ‘그들은 강생의 스캔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강생의 신비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강생의 신비를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지만, 그 이유도 알지 못했을 뿐더러 하느님의 무한하심이 우리의 작은 육체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 하느님의 아드님이 목수의 아들이어야 한다는 것, 신성이 인성 안에 감추어져야 한다는 것, 하느님께서 단순한 인간의 얼굴에, 말에, 행동에 머무르신다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캔들입니다. 곧, 하느님의 강생, 그분의 구체성, 그분의 “일상생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자렛의 예수라는 사람으로 구체화되셨고, 길의 동반자가 되셨으며,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동반하시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무척 사랑하십니다. 사실, 추상적인 하느님, 멀리 계시는 하느님,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삶에서, 문제에서, 사회에서 거리가 먼 신앙을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이 훨씬 더 편합니다. 혹은 우리는 단지 예외적인 일만 행하시고 항상 큰 감동을 안겨주시는, “특별한 효과”를 발휘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강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겸손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온유하시며, 하느님께서는 감추어 계시고, 우리의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살아가시며,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처럼, 그분께서 지나가실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위험에 처하는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멋진 글귀를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지나가실 때가 두렵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왜 두렵습니까? “제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지나가실 때가 두렵습니다(Timeo Dominum transeuntem).” 우리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으로 인해 걸려 넘어집니다. 이 현실 앞에서 우리 마음이 어떤지 생각해 봅시다.

이제 삼종기도를 바치는 가운데, 나자렛의 일상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이신 성모님께, 편견을 벗어버린 눈과 마음으로 우리의 눈이 놀라움에 열릴 수 있도록 청합시다. “주님, 당신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이러한 놀라움이 생깁니다. 우리는 주님을 정상적인 일상생활에서 만납니다. 하느님의 놀라우심에 열린 눈으로, 매일의 삶 안에 감추어 계시고 겸손하신 주님의 현존에 열린 눈으로 그분을 알아보고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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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7월 2021, 00:54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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