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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Vatican Media)

“교회의 사명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그에게 몸을 굽히고, 온유한 사랑과 연민을 통해 그를 돌보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의 우선적인 선택이자 그분의 방식이고, 교회의 방식도 이와 같아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내밀한 관계에서 힘을 길어내지 않으면 연민을 실천할 수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월 7일 연중 제5주일 삼종기도 훈화에서 이날 복음에 대한 묵상을 이 같이 전했다. 교황은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라) 한 달 만에 다시금 집무실 창가에서 삼종기도를 바친 후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인사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다시 성 베드로 광장에서 만나게 됐습니다! 오늘 복음(마르 1,29-39 참조)은 예수님께서 낫게 해주신 베드로의 장모의 치유와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온 수많은 병자와 고통받는 이들의 치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치유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첫 번째로 들려준 육신의 치유사화입니다. 그 여인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녀 앞에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태도와 행동은 상징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마르 1,31 참조)고 복음사가는 설명합니다. 거의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 단순한 행동 안에는 많은 감미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열이 가셨고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31 참조). 예수님의 치유 능력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치유된 사람은 정상적인 삶을 되찾고, 즉시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는 중요합니다. 이것이 참된 “건강”의 표징입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해가 지기를 기다린 다음, 안식일 의무가 끝난 후,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시지만, 당신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마르 1,32-34 참조). 그러므로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육과 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특별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육이나 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인간이 되게 하시고 말씀과 행적으로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에 대한 목격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보았고 나중에 이를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단지 당신 사명의 구경꾼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참여하게 하셨고, 파견하셨으며, 그들에게도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습니다(마태 10,1; 마르 6,7 참조). 그리고 이는 오늘날까지 교회의 삶에서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또한 이것은 중요합니다. 모든 병자들을 돌보는 것은 교회에게 있어서 “선택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액세서리 같은 게 아닙니다. 모든 병자들을 돌보는 것은 예수님의 사명이 그랬던 것처럼, 교회 사명의 전체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하느님의 온유한 사랑을 고통받는 인류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며칠 후인 2월 11일에 맞이할 세계 병자의 날, 우리는 이를 기억할 것입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이 메시지를, 교회의 이 본질적인 사명을 특별히 실감케 합니다. 오늘 미사 전례에서 들었던 욥의 목소리는 아주 고귀하지만 – 아주 존엄한 우리의 인간 조건 – 동시에 아주 연약한 우리의 인간 조건을 다시 한 번 대변해줍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늘 마음속에 “왜?”라는 질문이 솟아납니다.

이 질문에 대해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설명으로 응답하지 않으시고 – 왜 우리가 이토록 고귀하면서도 이토록 연약한 조건에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 ‘왜’라는 질문에 한 가지 설명으로 응답하지 않으시고 –, 베드로의 장모에게 행하셨듯이(마르 1,31 참조), 몸을 굽히시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사랑의 현존을 통해 응답하십니다. 타인을 일으키기 위해 몸을 굽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것이 유일하게 허용되는 때는 그를 일으키려고 돕기 위해 손을 잡을 때뿐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오직 그때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사명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당신의 주권을 “위에서 아래로” 드러내지 않으시고, 거리를 두고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몸을 굽히고 손을 잡으면서 드러내십니다. 당신의 주권을 가까이 다가감 안에, 온유한 사랑 안에, 연민 안에 드러내십니다. 가까이 다가감, 온유한 사랑, 연민은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까이 다가가시고, 온유한 사랑과 연민을 통해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복음서에서 건강의 문제나 혹은 다른 문제 앞에서 이런 표현을 읽게 되는지요. “(그분은)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연민),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가까이 다가가심은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연민이 아버지와의 내밀한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걸 우리에게 떠올려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해가 지고 동이 트기 전,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마르 1,35 참조). 바로 그곳에서 당신 직무를 완수하기 위한 힘을 길어내셨고, (그 힘으로) 설교하며 치유활동을 하신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온유한 사랑의 치유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기 위해, 예수님께서 치유하시게끔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도록 거룩하신 동정녀께서 우리를 도우시길 빕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치유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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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2월 2021, 0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