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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삼종기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삼종기도  (Vatican Media)

“하느님은 우리의 약함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께 마음의 문을 엽시다”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살(육신)이 되셨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월 3일 성탄 제2주일* 삼종기도를 통해 모든 면에서 우리의 인간성을 함께 나누시려는 하느님의 선택을 강조했다. 아울러 우리 각자가 아무 걱정 없이 “기쁨과 고통, 욕망과 두려움, 희망과 슬픔, 사람과 상황”을 하느님과 나눌 수 있도록 그분께 마음의 문을 열라고 초대했다( *편집주: 바티칸 시국은 주님 공현 대축일을 1월 6일에 지낸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주님의 성탄 대축일 다음 맞이하는 둘째 주일에 하느님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시기 전 그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 가운데 오시기 전 예수님에 관해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우리를 과거로 이끕니다. 특히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고 시작하는 요한 복음 서문에서 그분을 드러냅니다. ‘한처음,’ 이 말은 성경의 첫마디입니다. 창조 이야기도 이와 똑같은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오늘 복음은 우리가 주님의 성탄 때 관상했던 분,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이 처음부터 존재하셨다고 말합니다. 만물이 시작하기 전, 우주보다 이전, 모든 것보다 이전에 (이미) 존재하셨습니다. 그분은 시간이나 공간보다 먼저 계십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요한 1,4) 생명이 나타나기 전부터 존재하신 겁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분을 베르붐(Verbum), 곧 말씀이라 불렀습니다. 이로써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한 것입니까? 말은 소통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혼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합니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것이죠. 우리가 길을 가다가 혼잣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어. (...)” 말은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처음부터 말씀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우리와 소통하길 원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외아드님(요한 1,14 참조)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그분은 “참빛”(요한 1,9)이시며 우리를 악의 어둠으로부터 떼어내고자 하십니다. “생명”(요한 1,4)이신 그분은 우리의 생명을 잘 아시고 언제나 그 생명을 사랑하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말씀이시고,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와 소통하고자 하십니다.

또 그렇게 하시기 위해 말을 초월하셨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말씀이 “살(carne,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 14 참조)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살이 되셨다. 왜 요한 복음사가는 “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더 우아한 방식으로 사람(homo)이 되셨다고 말할 수 없었을까요? 요한 복음사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살”이라는 단어가 인간의 완전한 연약함, 완전한 취약함 안에 있는 우리의 인간 조건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가까이에서 만지기 위해 하느님이 연약함이 되셨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살을 취하신(사람이 되신) 순간부터 우리의 생명(삶)은 그분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업신여기시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과 나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사랑하는 자매님, 하느님은 우리의 연약함 안에서, 여러분의 연약함 안에서, 바로 거기서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바로 거기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기 위해 살을 취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곳, 여러분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곳, 바로 거기서 말입니다. 이는 매우 대담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결정은 대담합니다. 종종 우리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로 거기서 살을 취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제가 되시기 위해, 생명의 길을 함께 나누시기 위해, 하느님은 우리의 부끄러움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하느님은 살이 되셨고 되돌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입고 벗는 옷처럼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살과 더 이상 분리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결코 분리되지도 않으실 겁니다. 이제와 영원히 주님은 인간의 살로 된 당신의 몸을 가지고 하늘에 계십니다. 영원히 우리의 인간성과 하나가 되셨고, (살과) “결합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단지 말씀만 하신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살의 상처를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우리를 위해 겪으신 고통의 상처도 보여드린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당신의 살을 통해 중재자가 되신 예수님은, 고통의 표징들도 지니고 가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을 통해 아버지 앞에 계십니다. 사실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사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우리를 방문하러 오셨다가 가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주하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큰 친밀함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분과 기쁨과 고통, 욕망과 두려움, 희망과 슬픔, 사람과 상황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신뢰를 갖고 그렇게 행합시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말씀드립시다. 살을 취하시고, 이웃이 되신 하느님의 온유한 사랑을 맛보기 위해 구유 앞에서 침묵 중에 잠시 멈춥시다. 두려움 없이 주님을 우리에게, 우리 집에, 우리의 연약함에 초대합시다. 각자 잘 알다시피, 주님을 우리의 가정에도 초대합시다. 그분이 우리의 상처를 보시도록, 주님을 초대합시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 삶이 변할 겁니다.

성모님의 태중에서 말씀이 살(육신)이 되신 것처럼,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시려고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모시도록 우리를 도우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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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1월 2021, 1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