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한다면, 세상에 희망을 가져올 것입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20. 감사 기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감사 기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 루카 복음 사가가 전하는 한 일화에서 실마리를 얻겠습니다. 예수님이 (도시를) 지나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다가와 외쳤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나병 환자의 경우 신체적 고통에 사회적, 종교적 소외가 동반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외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만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율법이 정한 한계를 넘어서시며, 만져서는 안 되는 나병 환자를 만지시고, 그들을 포옹하시고, 그들을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나병 환자들과의 물리적 접촉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치유하신 후,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나병의 치유 여부를 확인하는 임무를 맡은 사제들에게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이르셨습니다(14절). 예수님은 다른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비를 청하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다음, 그들을 즉시 사제들에게 보내셨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했지만, 자신들이 나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즉시 사제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 나병 환자 열 사람은 모두 치유됐습니다. 사제들이 그들의 치유 여부를 확인하고, 그들을 정상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곧,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단 한 명만 돌아왔고, 나머지 아홉 명은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람이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일종의 “이단아”로 취급받았던 사마리아인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8)고 말씀하십니다. 이 일화는 감동적입니다!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세상을 둘로 나눕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과 감사하는 사람으로 나눕니다.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선물이자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모든 사건과 모든 필요는 감사 기도의 동기가 될 수 있다”(2638항)고 말합니다. 감사 기도는 언제나 여기서 시작됩니다. 바로 은총이 언제나 선행돼 있음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우리는 하느님이 생각하신 존재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우리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열망이 생기기도 전에 우리는 (누군가의) 열망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와 같이 바라보면, “감사”는 우리 일상을 이끄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곤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감사하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성사의 이름입니다. 바로 에우카리스티아(Eucaristia, 성체성사, 성찬례)입니다. 사실, 이 그리스어 ‘에우카리스티아’의 뜻이 바로 ‘감사(ringraziamento)’입니다. 모든 신앙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것에 대해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생명을 원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지게 될 일련의 많은 빚(부채) 가운데 첫 번째 빚일 뿐입니다. 감사해야 하는 빚(부채)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사람이 조건 없이 순수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종종 선생님이나 교리 교사들입니다. 의무의 요구를 넘어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우리 안에 감사의 마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우정 또한 항상 감사해야 하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계속 말해야 하는 이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람과 나누는 이 “감사합니다”는 ‘예수님과의 만남’ 안에서 자라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도시를) 지나가실 때 그분을 만난 사람들에게 자주 기쁨과 하느님께 대한 찬양을 불러 일으켰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탄생 사화에는 구세주의 오심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우리 또한 이 커다란 기쁨에 참여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가 이를 시사합니다. 당연히 그들 모두는 건강을 회복한 것에 기뻐했고, 자신들을 공동체에서 배제시킨 끝이 보이지 않는 강제 격리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기쁨에 기쁨을 더한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나병의 치유 외에도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에 기뻐했습니다. 그는 병에서 해방됐을 뿐만 아니라, 이제 자신이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러분이 감사할 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표현하십시오. 이는 아주 큰 도약입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 말입니다. 세상을 지탱하는 힘인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를 단테는 “해와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신곡』, 천국편, 제33곡 145행). 우리는 더 이상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집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릅니다. 그리고 이 “거처”에서 우리는 나머지 세계를 관상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은 우리에게 끝없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자녀들이고, 사랑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는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언제나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 안에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기쁨을 일구어 나갑시다. 하지만 악마는 모든 유혹을 동원해 우리를 속인 후, 항상 우리를 슬프고 외롭게 만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면, 그 어떤 죄와 위협도 우리가 많은 동료 여행자들과 함께 기쁨으로 삶의 여정을 이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감사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맙시다. 우리가 감사를 전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은 더 좋아질 것입니다. 비록 그 감사가 적을지라도 말입니다. 약간의 희망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세상은 희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과 감사를 표하는 태도로 작은 희망이라도 전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결합돼 있고, 모든 것이 연결돼 있으며, 우리 각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한 서간의 말미에서 말했던 바와 같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7-19). 성령의 불을 끄지 않는 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인생 프로그램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리를 감사로 이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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