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지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19. 전구 기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을 모른 체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인류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들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기도는 “장식적인” 활동이 되고, 연극에서 보여지는 표면적인 태도가 되고, (혼자서만 하는) 은밀한 태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면성(interiorità)이 필요합니다. 곧, 하느님과의 관계에 할애된 공간과 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굶주림을 위해 “우리를 들으시고, 우리를 강복하시고, 우리를 쪼개시고, 우리를 나누어 주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손 안에서 쪼개지고 나누어지는 빵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곧, (현실) 도피가 아닌 구체적인 기도입니다.
기도의 사람들은 고독과 침묵을 추구합니다.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음성을 더 잘 듣기 위해서입니다. 때때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세상에서 물러나와 자신의 골방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지만(마태 6,6 참조), 그 어느 곳에 있든지 항상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둡니다. 그 문은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열린 문이며, 전혀 기도하지 않지만 억눌린 부르짖음과 숨겨진 청원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열린 문이며, 실수하고 길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열린 문입니다. (…) 누구든지 기도하는 사람의 문을 두드릴 수 있으며, 기도하는 사람들 안에서 아무도 배제하지 않고 기도하는 자애로운(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며, 우리의 목소리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기도할 줄 모르거나 기도하지 않는 이들 혹은 기도하길 원하지 않거나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과 목소리가 됩니다. 이 사람들의 마음과 목소리는 우리의 중개를 통해 예수님과 아버지께 도달합니다. 긴 시간이든 30분 정도의 시간이든 고독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과 모두를 찾기 위해 세상 모든 것과 모두에게서 멀어집니다.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의 고통과 죄를 자신의 어깨에 메고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합니다.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안테나”인 것처럼 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문을 두드리는 모든 가난한 사람과 모든 것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청원하는 전구는 (…)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일치된 인간 마음의 특징이다”(2635항). 이 사실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조화를 이룹니다. 우리에게 자비로운 우리 자신들의 죄에 대한 자비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자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과 하나되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길 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마음과의 조화 안에서 기도하는 것 말입니다. “교회 시대에 와서, 그리스도인의 전구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며, 성인들의 통공을 표현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635항).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전구하거나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전구 기도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버지 앞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전구자이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아버지에게 당신 손의 못자국을 보여주며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으로 당신의 몸과 함께 아버지 앞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곧, 다른 이들을 위해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께 전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지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증오심으로 기도할 수 없고, 무관심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기도는 오직 사랑의 정신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는 척하거나, 스스로 기도하고 있다고 믿을 뿐입니다. 그 사람은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의 슬픔이나 기쁨을 아는 사람은 “최고의 시스템”을 찾는 사람들보다 (사람의 마음속)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도 안에는 인간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제아무리 실수를 많이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결코 그들을 내치거나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성령의 도움으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사람들을) 가리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기도해주고 있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죄인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항상 살아있고 현재진행형입니다(루카 18,9-14 참조). 우리는 그 누구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나약하고 고통스러운 죄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올릴 수 있는 기도는 다음의 기도입니다. “주님, 산 이는 누구도 당신 앞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시편 143,2 참조). 시편이 말합니다. “주님, 산 이는 누구도 당신 앞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주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는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채무자들입니다. 주님, 당신이 보시기에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러한 마음이 있을 때 기도는 풍요로워집니다. 왜냐하면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바리사이는 교만하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저 죄인들과 같지 않으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의롭습니다. 저는 항상 실천합니다. (…)”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거울을 통해 자신이 만든 현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만으로 칠해진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대부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는 전구 기도를 하는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박해의 시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을 되뇌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착한 목자는 자신의 백성들의 죄를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백성들에게 충실합니다. 착한 목자는 자녀들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거나 자신을 버려도 아버지로 계속 남아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을 세상에 휘말려 들게 하는 사람들에게도 목자로서의 봉사 안에서 꾸준합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닫지 않습니다.
교회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전구 기도를 바치고, 다른 이들을 위해 전구 기도를 바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 예컨대 부모, 교육자, 사목자, 공동체의 원장 (…) 등은 전구 기도를 바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아브라함과 모세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방어해야” 합니다. 이는 바로,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하느님의 눈과 마음으로, 하느님의 불굴의 연민과 온유한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같은 나무의 잎사귀들입니다. 떨어진 잎사귀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 안에서 서로를 돌봐야 한다는 큰 사랑을 떠올려줍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와 모두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