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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기쁨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규칙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해 자신의 사제품 51주년을 맞이한 12월 13일 대림 제3주일 삼종기도에서 세례자 요한을 언급했다. 교황은 “그 시대의 지도자”였던 세례자 요한이 한 번도 자기 자신에 대해 주의를 끌게 하지 않았다며, 그리스도를 향하면서 메시아의 오심을 보는 기쁨과 기다림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이날 삼종기도 말미에 관습대로 (신자들이 성 베드로 광장으로 가지고 온) “아기 예수상들”을 축복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기쁨으로의 초대는 대림시기의 특징입니다. 예수님 탄생에 대한 기다림, 우리가 살고 있는 기다림은 기쁨입니다. 마치 우리가 무척 사랑하는 사람의 방문을 기다릴 때 그런 것처럼 말이죠. 예를 들어 우리가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 친척 (...) 의 방문이 그렇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쁘게 기다립니다. 그리고 기쁨의 이런 차원은 특히 오늘, 성 바오로의 권고로 시작하는 대림 제3주일에 두드러집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입당송, 필리 4,4-5 참조). “기뻐하여라!”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가까이 오셨기”(필리 4,5 참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실수록, 우리는 더 기뻐합니다. 그분이 멀리 계실수록, 우리는 더 슬픔에 잠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규칙입니다. 언젠가 어느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밤을 지새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오늘날 믿는다고 말하는지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네,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는 얼굴, 슬픔에 잠긴 얼굴 말이죠. (...) 하지만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기쁘지 않습니까? 이것을 잠시 생각해보고 이렇게 자문해 봅시다. “나는, 주님이 내 가까이 오셨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기뻐하는가?”

오늘 요한복음은 성모님과 성 요셉을 제외하고,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탁월하게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과 그분의 오심을 보는 기쁨으로 살았던 성경의 인물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네,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요한 1,6-8.19-28 참조).

요한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을 장엄하게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6-7).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첫 번째 증인입니다. 말을 통해서 그리고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예언자들이 약속한 하느님의 파견자, 그리스도라고 제시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사명을 실현했는지 드러내는 점에서 모든 복음서는 일치합니다. 요한은 그 시대의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명성은 유다 전역으로 퍼졌고 (유다 지역을) 넘어 갈릴래아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순간도 자기 자신에 대해 주의를 끌게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셔야 할 분을 늘 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27절). (그는) 언제나 주님을 가리킵니다. 성모님처럼 말입니다. 성모님은 늘 주님을 가리키셨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성모님은) 언제나 주님을 중심에 두셨습니다. (우리) 주변의 성인들도 주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을 가리키지 않는 이는 그 누구도 성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기쁨의 첫째 조건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는 겁니다. 이는 자기소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실제로 중심이시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충만한 의미를 주는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내어주고 타인의 유익을 구하면서, 나를 되찾게 하기 위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끄는, 사랑의 역동성 그 자체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긴 여정을 걸었습니다. 기쁨의 여정은 산책이 아닙니다. 늘 기쁨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기 위해, 온 마음과 온 힘을 기울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젊은 시절부터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요한은 성령의 바람에 자유로이 따르고자 불필요한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광야로 물러났습니다. 물론 요한의 성격에 대한 몇 가지 묘사에 따르면, 그는 유일무이하고 (누구와도) 비할 데 없었지만 모든 이에게 적합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자기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참된 기쁨을 찾고자 하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특히 세례자 요한은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은 이들을 위한 모델입니다. 이들은 단지 자기 자신과 세속에서 벗어나는 가운데 이를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 이끌면서 말입니다. 기쁨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향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쁨은 우리 신앙의 특징이 돼야 합니다. 어두운 순간에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아는 데서 나오는 내적 기쁨 말입니다. 주님! 주님! 주님! 이것이 우리 삶의 중심이고, 이것이 우리 기쁨의 중심입니다. 오늘 잘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쁨을 전할 줄 아는 기쁜 사람인가, 아니면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늘 슬픔에 잠긴 사람들 같은가? 만일 여러분에게 신앙의 기쁨이 없다면, 여러분은 증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저런, 신앙이 저렇게 슬픈 거라면, 신앙이 없는 편이 더 낫겠어.”

이제 삼종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동정 마리아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을 침묵 가운데 기다리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셨고, 말씀을 받아들이셨고, 말씀을 잉태하셨습니다. 성모님 안에서 하느님은 이웃이 되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교회는 마리아를 “즐거움의 샘(Causa della nostra letizia)”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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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2월 2020, 2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