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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Vatican Media)

“교회는 장터나 정당이 아니며, 성령께서 만드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월 25일 교황청 사도궁 도서관에서 진행된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사도행전에 묘사된, 기도 안에서 살고 “기도 안에서 항구했던”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해 말했다. 교황은 하느님 말씀의 경청과 형제적 친교, 성체성사와 기도가 없다면 ‘교회성(ecclesialità)’도 없다고 말했다. “교회를 만드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일의 떠들썩함이 아닙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16. 초대 교회의 기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세상에서 초대 교회의 첫 걸음은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의 서간들과 사도행전의 위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교회의 이미지를 새롭게 제공합니다. 걸어 가는 교회, 활동하는 교회, 선교 활동의 기초와 추진력을 기도 안에서 함께 모아 들이는 교회의 이미지입니다.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습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 체험의 기준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고 전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기도 안에서 항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생활의 네 가지 본질적인 특징을 발견합니다. 첫째로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경청, 둘째로 상호 친교의 수호, 셋째로 빵을 떼어 나눔, 넷째로 기도입니다. 이 특징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굳건히 일치를 이룬다면, 곧 공동체 안에서, 그분 말씀과 성찬례와 기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굳건히 일치를 이룬다면 교회의 존재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설교와 교리 교육은 스승(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증언합니다. 형제적 친교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이기심과 특정주의(particolarismo)에서 우리를 보호합니다. 빵의 떼어 나눔은 우리 가운데 예수님 현존의 성사를 이루어 줍니다. 예수님은 결코 부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와 함께 걸어 가십니다. 끝으로, 기도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소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 특징의 “좌표” 밖에서 자라나는 교회의 모든 것은 기초가 없습니다. 한 상황을 식별하기 위해 우리는 그 상황 안에서 이 네 가지 좌표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곧, 설교, 형제적 친교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사랑), 빵을 떼어 나눔(성체성사적 삶), 기도 말입니다. 이 좌표 안에 들어있지 않는 것은 ‘교회성(ecclesialità)’이 없고,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를 만드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일의 떠들썩함이 아닙니다. 교회는 장터가 아닙니다. 교회는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는 사업가의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함께 모으기 위해 보내신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교회는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 생활 안에서, 성체성사 안에서, 기도 안에서, 언제나 말입니다. 이 좌표 밖에서 자라는 모든 것은 기초가 없으며, 모래 위에 지어진 집과 같습니다(마태 7,24-27 참조). 교회를 만드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일의 떠들썩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미래를 건설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가끔 저는 좋은 의도이지만 잘못된 길을 택하는 공동체를 볼 때면 큰 슬픔을 느낍니다. 교회를 이루는 것을 마치 정당처럼 모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의견은 무엇이고, 소수의 의견은 무엇이고, 이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저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마치 시노드와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시노드의 여정 같은 것 말입니다.” 저는 자문해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디에 계시는가? 거기에 계시는가? 기도는 어디에 있는가? 공동체적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성찬례는 어디에 있는가? 이 네 가지 좌표가 없으면 교회는 인간적 사회단체가 되고, (다수와 소수의) 정당이 되고, 변화는 마치 회사처럼 다수 혹은 소수에 의해 결정됩니다. (…) 거기에는 성령이 없습니다. 성령의 현존은 이 네 가지 좌표에 의해 보장됩니다. 어떤 상황이 교회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평가하기 위해 이 네 가지 좌표, 곧 공동체 생활, 기도, 성찬례, 설교(복음전파)가 있는지 자문해 보고, 이 안에서 삶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자문해 봅시다. 이것들이 없으면 성령이 계시지 않는 것이며, 성령이 없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인도주의적 단체나 자선 단체가 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좋은 단체로 말입니다. 말하자면 정치 집단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는 이와 같은 것들에 의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른 모든 회사처럼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으로 성장합니다. 누가 매력을 느끼게 합니까? 성령이십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님의 다음 말씀을 결코 잊지 맙시다. “교회는 개종 강요로 성장하지 않고 매력으로 성장합니다.” 예수님의 매력을 느끼게 하는 성령이 없는 곳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좋은 의도를 지닌 멋진 친구들로 구성된 친목모임이 있을지는 몰라도 거기엔 교회도 없고, 공동합의성(sinodalità)도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복음화의 강력한 동력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이었음을 발견합니다. 그 기도 모임에 참여한 사람은 예수님의 현존을 직접 체험하고, 성령으로부터 감동을 받았습니다. 초기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의 역사가 예수님의 승천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계속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 곧 말씀에 대한 경청을 전하고, 주님과의 친교에 들어가기 위해 기도함으로써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기도는 빛과 열기를 불어넣습니다. 성령의 선물이 그들에게 열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와 관련하여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매우 함축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기도하는 교회에게 그리스도를 상기시켜 주시는 성령께서는 또한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 (…) 성사와 교회의 사명 수행에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표현하게 될 새로운 기도문들이 생겨 나게 하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625항). 교회 안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곧,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우리에게 당신에 대해 가르치고 상기시켜 줄 것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선교는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지 기억력 연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의 여정을 걸어 가면서, 예수님을 새롭게 나타내 보이면서,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그분의 영으로부터, 출발하고 선포하고 봉사하기 위한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 안에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고 복음이 모든 이에게 선포되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빠져듭니다. 하느님은 모두를 위한 하느님이시며, 예수님 안에서 모든 분리의 벽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곧,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에페 2,14). 예수님은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의 삶은 전례, 모임, 공동체 및 개인 기도 시간들이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바다를 항해하고 위험을 극복하고 굴욕을 참아내며 선교 여행을 떠나는 설교자들에게 힘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주시며, 사랑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모든 신앙인의 삶의 신비로운 뿌리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했습니다. 몇 세기 후에 살고 있는 우리 또한 모두 같은 체험을 합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기도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기도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오직 경배의 침묵 속에서만 이 말의 모든 진실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경배의 의미를 되찾아야 합니다. 경배합시다. 하느님을 경배하고, 예수님을 경배하고, 성령을 경배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경배합시다. 침묵 속에서 경배합시다. 경배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모든 역사의 시작과 끝이시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증거와 선교에 힘을 주는 성령의 살아 있는 불꽃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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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1월 2020, 2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