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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Vatican Media)

“가난한 이들은 복음의 중심에 있습니다. 사랑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타인을 위한 봉사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그저 규칙을 지키는 것만으로 그치는 편협한 그리스도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 제4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미사를 거행하며 이 같이 말했다. 이 미사에는 전 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대표하는 100여 명이 참례했다. 교황은 다가오는 성탄절을 준비하며 우리가 무엇을 사는 것에 골몰할 게 아니라 무엇을 내어 줄지 고민하자고 초대했다.

번역 이창욱

우리가 방금 들은 비유는 ‘처음-중간-마지막’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네 삶의 ‘처음-중간-마지막’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비유의 ‘처음’은 모든 이가 엄청난 재산으로 시작한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주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재산을 남겨두지 않고 그것을 종들에게 나눠줍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마태 25,15)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나눠줬습니다. 한 탈렌트는 당시 약 20년치의 보수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계산됩니다. 이 정도면 평생 지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풍족한 재산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처음’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시작됐습니다. 언제나 모든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은총으로 시작합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손에 그토록 많은 좋은 것을 맡기신 하느님의 은총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서로 다른 재능(탈렌트)을 맡기십니다. 우리는 엄청난 부(富)를 전달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부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러합니다. 곧, 우리가 받은 생명, 우리 안에 있는 선함,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감출 수 없는 아름다움을 통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분의 눈에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역사 안에서 유일무이하고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방식이며, 또한 하느님이 우리에 대해 느끼시는 방식입니다. 

다음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자주 우리에게 부족한 것만 바라보고, 이러한 결핍에 대해 불평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약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magari; if only)”라는 유혹에 빠집니다. ‘만약 내가 그 일자리를 얻었다면 좋았을 텐데. 만약 내가 그 집을 소유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만약 내가 돈을 벌어 성공했다면 좋았을 텐데. 만약 그 문제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만약 내 주변에 더 나은 사람들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환상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고,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잊게 만듭니다. 물론 여러분은 ‘그러한 것(만일 그랬다면 좋았을 것)’을 현재 가지고 있진 않지만, ‘이것(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탈렌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는 우리로 하여금 이 탈렌트를 잊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아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들을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신뢰하십니다. 탈렌트를 땅에 숨겨둔 종마저도 신뢰하시며 그 종이 자신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받은 것을 선용하길 바라십니다. 한마디로 주님은 현재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과거의 향수에 젖지 말고 주님의 다시오심을 꾸준히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그러한 몹쓸 향수는 영혼을 해치는 우울하고 음울한 기분 같은 것이며, 언제나 (앞이 아니라) 우리의 뒤편을 바라보게 하고, 언제나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라 타인의 것에만 신경쓰게 만듭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노동의 가능성이나 우리의 상황을 결코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 우리의 가난(부족함)조차도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유의 ‘중간’에 이르렀습니다. 종들의 일, 다시 말해 ‘봉사(섬김)’입니다. 봉사는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봉사는 우리의 재능을 꽃피우게 하고 삶에 의미를 줍니다. 사실 ‘봉사하기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곱씹고, 수없이 되풀이해야 합니다. 봉사하기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묵상해야 합니다. 봉사하기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어떤 봉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까? 복음에서 훌륭한 종들은 ‘위험을 감수하는’ 종들입니다. 그들은 겁이 많다거나 지나치게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최선을 다해 선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것들은 투자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위대함이란 한쪽에 얼마나 비축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재산을 축적하며 인생을 보내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풍족한 삶’만 생각하지 ‘선을 행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지 않고 ‘자기가 필요한 것’만 따라가는 삶은 얼마나 허무한지요! 만약 우리가 선물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타인을 위한 선물이 되기 위함입니다. 여기 계신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자문해 봅시다. 나는 그저 내 요구만 쫓아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타인의 요구를 살필 줄 아는 사람인가?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살필 줄 아는 사람인가? 나의 손은 [상대방에게 내어주는 손짓을 하며] 열려 있는가, 아니면 [거두어들이는 손짓을 하며] 닫혀 있는가? 

재능을 투자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종들은 네 차례에 걸쳐 “성실한 종”(25,21.23)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에서 성실함은 위험이 없다는 걸 뜻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부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뜻합니까?” “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위험을 감수하십시오. 만일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세 번째 종처럼 되고 맙니다. 형제자매님의 능력, 영적·물질적 자산,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위험을 감수하십시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성실함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하다는 것은 우리네 삶을 넘겨주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신중하게 세운 계획이 봉사의 요구 때문에 흔들리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만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 제가 만일 봉사해야 한다면 (...)” 여러분의 계획이 흐트러지도록 내버려 두시고, 가서 봉사하십시오. 어떤 그리스도인이 규칙의 준수와 계명의 존중에만 집착하며 방어적인 삶에 투신할 때 참으로 슬픕니다. 그러한 “편협한” 그리스도인은 규칙을 넘어 절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절대 그러지 못합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일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 그러니까 위험을 회피하려고 자기 자신만 신경쓰는 사람들은, 삶에서 영혼을 미라로 만드는 절차에 들어가고, 결국엔 미라가 되고 맙니다. 제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태도는 충분치 않습니다. 규칙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충실함은 단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걸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비유에 나오는 게으른 종이 바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진취적 계획과 창의성은 결여되고, 불필요한 두려움 뒤로 숨고서는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땅에 묻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악한 종”(26절)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가 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선한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실수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오히려 태만의 죄를 짓는 편을 택했습니다. 그는 아낌없이 내어 주길 좋아하시는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받은 선물을 고스란히 돌려드림으로써 하느님께 더 아픈 상처를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이것을 주셨으니, 저는 이것을 다시 드립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관대하게 최선을 다하고, 사랑의 용기로 두려움을 이기고, 공범자로 전락하는 수동적 태도를 극복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날, 이 불확실성의 시기에, (코로나19로) 취약한 시기에, 무관심의 태도로, 그저 우리 자신만 생각하며 인생을 허비하지 맙시다. “평화롭다, 안전하다!”(1테살 5,3) 이렇게 말하며 착각하지 맙시다. 성 바오로는 무관심에 전염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 봉사해야 할까요? 주인은 불성실한 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27절). 우리에게 장기 이자를 붙여주는 이 “대금업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가난한 이들’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없이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예수님과 같습니다. 부유하셨으나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가난하게 되시고, 스스로 죄가 되시어 가장 비참한 가난이 되신 예수님 말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수익을 보장하고, 사랑 안에서 이미 우리를 풍요롭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싸워야 할 가장 큰 가난은 사랑의 빈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가장 큰 가난은 사랑의 빈곤입니다. 잠언서는 사랑을 열심히 실천한 여인을 칭송합니다. 사랑의 가치는 진주보다 훨씬 귀합니다. 잠언서가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잠언 31,20)고 말하는 이 여인은 우리가 본받을 만합니다. 이 여인의 큰 부유함이란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요구하는 대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여러분이 받은 탈렌트는 곱절이 될 것입니다.

이제 축제의 시기, 성탄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을 살 수 있을까? 무엇을 더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쇼핑하러 가야 해.” 우리는 이와 다르게 말합시다. “나는 타인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시고, 바로 그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유의 ‘마지막’에 도달했습니다. (더 받아) 넉넉해진 자가 있는가 하면 삶을 허비하고 (가진 것마저 빼앗겨) 초라하게 남게 될 자도 있을 겁니다(29절 참조). 결국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현실(진리)이 드러날 겁니다. 세상의 거짓은 사라질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 권력과 재화는 삶에 의미를 주겠지만, 우리가 나눠준 사랑이야말로 참된 부유함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사물들은 스러지지만, 사랑은 드러납니다. 교회의 위대한 교부 한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로, 죽음이 찾아와 이 세상이라는 연극이 끝나면, 모든 사람은 부나 가난이라는 가면을 벗고 다른 세상으로 떠납니다. 모두가 각자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으면, 더러는 진실로 부유하고 더러는 가난하며, 더러는 고귀한 신분이고 더러는 하찮은 신분임이 드러납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라자로에 관한 둘째 강해」, 3). 만일 우리가 가난한 삶을 원하지 않는다면,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섬기는 은총을 청합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저 봉사하며 살아가는 하느님의 수많은 충실한 종들에게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로베르토 말제시니(Roberto Malgesini) 신부님을 생각합니다. 말제시니 신부님은 이론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봉사하는 삶의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위로하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온유하게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줬습니다. 그분에게 있어 하루의 ‘처음’은 하느님의 선물을 받기 위한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하루의 ‘중간’은 사랑의 실천(애덕, 자선)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열매 맺기 위한 사랑의 실천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복음의 빛나는 증거였습니다. 말제시니 신부님은 매일 만나는 수많은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손을 뻗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 각자 안에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말만이 아니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바라시는 대로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합시다. 네, 꼭 그렇게 이뤄지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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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1월 2020, 1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