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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Vatican Media)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감의 논리를 가르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월 22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삼종기도를 통해 이날 최후의 심판에 관한 복음 구절을 설명하며 “감정이 아니라 사랑을 근거로” 최후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행실에 따라, 가까이 다가가 친절한 도움을 주는 가엾은 마음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는 전례력을 마감하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냅니다. 전례력 전체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담고 있는 거대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역사의 시작이자 완성이십니다. 그리고 오늘 전례는 “오메가”, 다시 말해 최종목표에 초점을 맞춥니다. 역사의 의미는 그 절정 앞에 이르러서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곧, (역사의) 끝(la fine)이 바로 목표(il fine)인 셈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마태 25,31-46 참조)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지상 삶의 결론(에필로그)에 최후 심판에 관한 설교를 배치함으로써 바로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사형선고를 내리려고 하는 그분이야말로 사실은 최고 심판관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역사의 주님, 온 누리의 임금, 모든 이의 심판관이심을 스스로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역설은 그 심판관이 무시무시한 왕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온유와 자비로 가득 한 목자라는 점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목자의 모습을 사용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나쁜 목자들과는 다르게 백성을 위해 하느님의 개입에 대해 이야기했던 에제키엘 예언자의 표현에서 (참된) 목자의 모습을 취하십니다(에제 34,1-10 참조).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 떼를 보살피기보다 자신을 돌보기를 더 좋아하는 잔인한 자들이고 착취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직접 당신의 양 떼를 개인적으로 보살펴주겠노라 약속하시며, 불의와 횡포로부터 양 떼를 지켜주십니다. 당신 백성을 위한 이 하느님의 약속이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실현됐습니다. 바로 그분이야말로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분 스스로 당신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단지 왕-목자와 동일시하실 뿐 아니라 잃어버린 양과도 동일시하십니다. “이중적인 신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곧, 왕-목자이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양들, 다시 말해 가장 작고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과 동일시하십니다. 또한 심판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십니다. 곧, 심판은 이런 사람들에게 베풀었거나 혹은 거절했던 구체적인 사랑을 근거로 내려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바로 심판관이시고, 그들 각자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심판관이시고, 그분은 하느님-인간이시지만, 그분은 가난한 사람이기도 하시고, 그분은 감추어계시며, 그분이 바로 그곳에서 언급하시는 가난한 이들의 인격 안에 현존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혹은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혹은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15,40.45 참조). 우리는 사랑을 근거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감정에 기반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실에 따라, 가까이 다가가 친절한 도움을 주는 가엾은 마음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병자들,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 정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다가가는가? 그곳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의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세상 마지막 날에 당신의 양 떼를 둘러보실 겁니다. 목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하실 뿐 아니라, 당신과 동일시하신 양들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하실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 겁니다. “너는 나와 같은 목자였느냐?” “너는 과연 도움이 필요했던 이 사람 안에 있었던 나의 목자였느냐, 아니면 무관심했느냐?” 형제자매 여러분, 무관심의 논리를 경계합시다. 우리 머리에 즉시 떠오르는 그런 논리를 경계합시다. 곧, 우리가 한 가지 문제를 볼 때 다른 쪽을 바라보는 그런 무관심의 논리 말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를 떠올려봅시다. 강도를 만나 두들겨 맞아 상처입고 초주검이 된 채 길바닥에 버려진 그 불쌍한 사람은 그곳에 홀로 있었습니다.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 쪽을 바라보며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 쪽을 바라봤습니다. 과연 나는 도움이 필요한 내 형제자매 앞에서 이 사제처럼, 이 레위인처럼 무관심하고 다른 쪽을 바라봅니까? 나는 이런 행실을 근거로 심판받을 겁니다. 내가 다가갔는지, 도움이 필요한 이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봤는지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논리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사람, 저 사람, 이런 사람에게 행한 것은 바로 너희가 나에게 행한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이 사람, 저 사람, 이런 사람에게 행하지 않은 것은 바로 너희가 나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논리, 다가감의 논리, 가장 고통받는 이들 안에 계시는 그분께 사랑으로 다가서는 논리를 가르쳐주시길 빕니다.

섬기는 가운데 다스리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길 동정 마리아께 청합시다. 하늘로 승천하신 성모님은 사랑의 길에서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셨기에 당신 아드님으로부터 왕관을 받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이십니다. 겸손하고 관대한 섬김의 문을 통해, 지금부터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법을 성모님께 배웁시다. 그리고 오직 이 말씀을 간직하고 집으로 돌아갑시다. “내가 바로 그곳에 있었단다. 고맙다!” 혹은 “너는 나를 잊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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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1월 2020,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