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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분에게 우리는 숫자가 아니라 얼굴과 마음을 지닌 존재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0월 14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진행한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은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 곧 시편에 관한 내용이었다. 교황은 기도하기 위해선 우리가 본래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삶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이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또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신다고 강조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교리 교육 - 10.  시편 기도. 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기도를 지속적으로 접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기도로만 구성된 책도 만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기도하는 이들의 고향이 되고, 수련장이 되고, 집이 된 책입니다. 바로 시편입니다. 시편은 기도하기 위해 150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시편은 하느님과의 대화의 체험을 통해 “기도하는 법을 아는 것”을 전달해 주기 때문에 지혜문학서들의 일부에 해당합니다. 시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물들이는 기쁨, 고통, 의심, 희망, 괴로움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발견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각각의 시편이 “신분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든지 바칠 수 있는 진실한 기도”(『가톨릭교회 교리서』, 2588항)라고 설명합니다. 시편을 읽고 또 읽음으로써 우리는 기도의 언어를 배웁니다. 사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통해 다윗 왕과 다른 여러 기도하는 이들의 마음 안에 시편의 영감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모든 이로 하여금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감사하고, 당신께 청하고, 기쁨과 고통 속에서 당신께 기도하고, 당신의 사업과 율법의 경이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려고 말입니다. 요약하자면, 시편은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과 대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휘발되어 사라지는 사람들, 추상적인 사람들, 기도를 미학적이거나 또 다른 어떤 경험과 혼동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시편은 탁상에서 나온 텍스트가 아닙니다. 시편은 살아있는 실존에서 솟구치는, 이따금씩 극적이기도 한 탄원(기도)들입니다. 시편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본래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해 영혼을 치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 저는 이렇습니다”고 말하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속으로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의 아름다운 것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시편 안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삶이 문제점들과 고충 및 불확실성들로 가득 찬, 살과 피를 지닌 기도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시편 저자는 이런 고통에 대해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편 안에서 고통은 ‘물음’으로 바뀝니다. 고통을 겪는 것에서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많은 물음 가운데 시편 전체를 관통하는 끊임없는 외침처럼, 유보된 상태로 남아 있는 물음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반복하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모든 고통은 해방을 요구하고, 모든 눈물은 위로를 염원하고, 모든 상처는 치유를 기다리고, 모든 무고는 철회돼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 언제까지 고통 받아야합니까? 주님,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우리는 이러한 말로 많이 기도했습니다. “언제까지리이까?” 주님, 이제 그만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게 함으로써 시편은 우리에게 고통에 익숙해지지 말라고 가르치며, 치유되지 않는 한 생명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떠올려 줍니다. 인간의 존재는 한 순간이고, 그의 삶은 덧없지만, 기도하는 이는 하느님 보시기에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그렇기에 부르짖음이 의미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느님 보시기에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눈에 소중하다는 이러한 인식을 우리 내면에 불러 일으키는 것은 성령의 은총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도하도록 이끌림 받았습니다. 

시편 기도는 이러한 부르짖음에 대한 증거입니다. 다양한 부르짖음에 대한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삶 안에서 고통은 수천가지 형태를 취하고, 질병과 증오, 전쟁과 박해, 불신 (…) 이라는 이름을 취하고, 최고의 “스캔들”인 죽음이라는 이름까지도 취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안에서 죽음은 인간의 가장 불합리한 원수로 나타납니다. 죽음은 소멸과 종말이 용인된, 잔인하게 처벌받아 마땅한 범죄가 아닙니까? 시편 저자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곳에 개입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합니다. 기도가 그 자체로 구원의 길이요 구원의 시작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고통을 겪습니다. 하느님을 믿든, 그분을 거부하든 모든 사람이 말입니다. 하지만 시편 안에서 고통은 ‘관계’가 됩니다. 고통은 들어주는 귀를 기다리며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의미나 목적없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겪는 고통도, 보편적인 법칙의 특정 사례로 남지 않습니다. 고통은 언제나 “나의” 눈물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눈물은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의” 눈물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눈물이 있습니다. “나의” 눈물과 “나의” 고통이, 기도와 함께,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나를 재촉합니다. 그것은 누군가 나보다 앞서 흘린 것이 아닌, “나의” 눈물입니다. 네, 많은 사람들이 울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입니다. 하지만 “나의” 눈물은 나의 것입니다. “나의” 고통은 나의 것이고, “나의” 아픔은 나의 것입니다. 

조금 전, 이곳 바오로 6세 홀에 들어오기 전에 저는 얼마 전 코모교구에서 피살된 신부님의 부모님을 만났습니다. 그 신부님은 도움을 주기 위해 봉사하다가 피살됐습니다. 그 신부님의 부모님이 흘리는 눈물은 오로지 “그분들의” 것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목숨까지 헌신한 아들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로하려 할 때,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의 고통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통은 그의 것이고, “그녀의” 눈물은 그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눈물은 나의 것이며, “나의” 고통도 “나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눈물과 고통을 주님께 올립니다.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모든 고통은 신성합니다. 시편 56편의 저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는 뜨내기, 당신께서 적어 두셨습니다. 제 눈물을 당신 부대에 담으소서. 당신 책에 적혀 있지 않습니까?”(9절)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낯선 사람이나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이름으로 호명된, 얼굴과 마음을 지닌 존재입니다. 

시편 안에서 신앙인은 답을 찾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이 잠겨 있어도 하느님의 문은 열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 유죄 판결이 내려졌더라도 하느님 안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들어주십니다.” 기도하면서 때론 이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문제가 항상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착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삶에 대한 많은 물음이 탈출구 없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와 함께할 것이고, 하나의 싸움이 끝나면 또 다른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를 듣는 분이 계신다면 모든 것은 견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기억되지 않고 저버림 안에서 고통받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이러한 것에서 구원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자주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부르짖음은 이 세상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계신, 고통받고 죽어가는 당신의 모든 자녀들 때문에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께로 올라갑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힘든 시기에 저는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을 생각했는데, 이것이 도움이 됐습니다. 예루살렘을 보며 눈물 흘리시고, 나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신 예수님을 말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위해 눈물 흘리셨습니다. 하느님이 우셨습니다. 우리의 아픔을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한 영성가는 하느님이 눈물을 흘리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고통 중에 눈물 흘리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큰 위안이 됩니다. 이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도와줍니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삶이 우리에게서 고통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해도 선익의 큰 지평을 열고 완성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기도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이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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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0월 2020, 1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