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Vatican News

“코로나19 대유행에 대한 사회적 대응은 ‘공동선’을 위한 정책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특히 백신의 경우 이기심이나 당파적 이익이 없는 “사회적 사랑”이 필요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9일 오전 교황청 사도궁 내 산 다마소 안뜰에서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을 진행하며 이 같이 말했다. 교황은 “문화·정치적 차이”를 모르는 바이러스는 “장벽 없는 사랑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세상 치유”:  6. 사랑과 공동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우리가 겪고있는 위기는 모든 이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모두가 ‘공동선’을 추구한다면 이 위기에서 벗어나 보다 나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와 반대로 한다면 보다 나빠질 것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당파적 이익의 출현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백신의 경우처럼, 가능한 해결책들을 적절하게 취한 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판매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부는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갈등을 일으키거나 고조시키면서, 현 상황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고통엔 관심이 없고, 그냥 지나치며 자신의 길을 가기도 합니다(루카 10,30-32 참조). 이들은 본시오 빌라도를 본받는 자들입니다. 현 상황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코로나19 대유행과 그로 인한 사회적·경제적 위기에 대한 그리스도인 대응은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우리를 앞질러 가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반합니다(1요한 4,19 참조).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사랑에 있어서도, 해법에 있어서도 언제나 우리를 앞질러 가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이 거룩한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를 사랑하는 이들, 내 가족, 내 친구들, 내 그룹을 사랑하는 것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도 사랑하고, 나를 모르는 이들도 사랑하며, 이방인들과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들이나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사랑하게 됩니다(마태 5,44 참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성덕의 가장 높은 단계는, 말하자면 원수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수를 포함한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배우고 개선할 수 있는 예술입니다. 우리를 풍요롭고 자유롭게 만드는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넓고 포용적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돌보고, 치유하고, 좋은 일을 행합니다. 많은 경우, 수많은 논쟁을 하기보다 애정 표시 한 번 하는 게 더 낫습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논쟁을 하기보다 용서의 포옹 한 번 하는 게 더 낫습니다. 이것이 치유하는 포용적 사랑입니다.

‘사랑’은 두세 사람 사이의 관계나 친구 혹은 가족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나아갑니다. 사랑은 자연과의 관계를 포함하며(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231항), 사회적·정치적 관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907-1912항 참조). 우리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의 가장 탁월한 표현 가운데 하나는 사회적·정치적 표현입니다. 이는 인간 발전과 모든 유형의 위기에 대응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찬미받으소서」, 231항). 우리는 사랑이 가정과 우정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또한 사회적·문화적·경제적·정치적 관계를 풍요롭게 하면서, 우리가 “사랑의 문명(civiltà dell’amore)”을 건설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의 문명’은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이 즐겨 표현하신 말씀이며[1]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도 언급하셨습니다. 이러한 영감이 없으면 이기심과 무관심과 쓰고 버리는 문화가 우세할 것입니다. 곧,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것, 혹은 내가 사회에서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곳에 들어올 때 한 부부가 저에게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장애가 있는 아들이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들이 몇 살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나이가 많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합니까?” 그들은 “우리는 아들과 함께하면서, 도와주고 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장애를 가진 아들을 위한 부모의 평생의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원수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이 사회적·정치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 보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과연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하고, 그들과 대화해야 하고, 그들과 함께 사회적·정치적인 “사랑의 문명”을 건설해야 합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되는 문명을 건설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전쟁과 분열과 시기심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가족 간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포용적인 사랑은 사회적이고, 가정적이고, 정치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각자의 진정한 선익이란 단지 개인의 선익만이 아니라 공동의 선익이며, 공동의 선익이 인간을 위한 진정한 선익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905-1906항 참조).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의 선익만 추구한다면, 그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신의 선익을 모든 사람들에게 열어놓고 그것을 함께 공유한다면, 그는 더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건강이란 개인의 선익일 뿐 아니라 공동의 선익이기도 합니다. 모든 이의 건강을 돌보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장벽과 국경 혹은 문화적·정치적 차이를 모르는 바이러스는 장벽과 국경 혹은 차이를 모르는 ‘사랑’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하기보다는 공유하도록 격려하는 사회 구조를 생성할 수 있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가장 취약한 이들을 버리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최악이 아닌 최고의 인간 본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진정한 사랑은 쓰고 버리는 문화를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고 창의력을 발휘할 때, 우리가 신뢰하고 연대성을 만들어 낼 때, 공동선을 위한 구체적인 시도들이 생겨납니다.[2] 이는 크고 작은 공동체적 차원과 국제적 차원 모두에 해당됩니다. 가정에서 하는 일, 지역에서 하는 일, 마을에서 하는 일, 대도시에서 하는 일, 국제적으로 하는 일은 동일합니다. 자라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동일한 씨앗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정이나 동네에서 질투와 싸움으로 시작하면 결국에는 “전쟁”을 치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과 용서를 나누면 모두에게 사랑과 용서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코로나19 대유행에 대한 해결책이 개인들이나 기업들 혹은 국가들의 이기심의 표식을 지니고 있다면, 아마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에서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바이러스가 강조하고 명확하게 한 인간적·사회적 위기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모래 위에 (집을) 짓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마태 7,21-27 참조)! 건강하고, 포용적이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공동선의 바위 위에서 건설해야 합니다.[3] 공동선은 하나의 바위입니다. 이는 일부 전문가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임무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공동선의 증진이 모든 시민에게 주어진 정의의 의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시민은 공동선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또한 사명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가르친 것처럼, 우리의 일상 노력들을 공동선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받고 전파하는 방식입니다. 

불행하게도 정치는 종종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치인들이 모두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불행히도 정치가 종종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부정적인 시각에 머물러선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과 공동선을 중심에 두는 좋은 정책의 실행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반응해야 합니다.[4] 만일 여러분이 인류 역사를 읽는 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행한 많은 거룩한 정치인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시민이, 특별히 사회적·정치적 임무와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 윤리적 원칙에 입각해서 행동하고, 사회적·정치적 사랑으로 힘입어 행동한다면 이러한 방식은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들, 특히 평신도들은 이에 대한 좋은 증거를 행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평신도들은 본질적인 사회적 차원을 일구어 나가면서, 애덕의 덕을 통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회적 사랑을 키워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작음에서 시작해 모든 이에게 기여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우리의 사회적 사랑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공동선은 우리 모두의 참여를 필요로 합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각자의 몫을 하고,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동체적이고 국가적이며 국제적인 차원에서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으며, 또한 환경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찬미받으소서」, 236항 참조). 우리의 행동, 심지어 가장 겸손한 행동조차도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이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정의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몹시 사랑하신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일러준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리고 개인의 선익뿐만 아니라 공동의 선익을 위해 다 함께, 모든 이를 위한 공동선을 위해 일하면서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1] 「제10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1977년 1월 1일)」: AAS 68 (1976), 709.

[2]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38항 참조. 

[3] 「사회적 관심」, 10항. 

[4] 프란치스코 교황, 「제52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2019년 1월 1일)」(2018년 12월 8일) 참조.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09 9월 2020, 1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