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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양심의 자유는 언제나 어디서나 존중돼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6월 17일 포르투갈 출신 외교관 아리스티데스 드 소우자 멘데스의 증거에 영감을 받아 제정된 ‘양심의 날’을 기억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 말씀에 비추임 받은 올바른 양심으로 일관성의 모범을 보여줄 수 있길” 기원했다.

Amedeo Lomonaco / 번역 이재협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은 6월 17일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을 마치며 “언제나 어디서나 존중돼야 할” 가치인 양심의 자유를 보여준 증인을 기억하고 이 주제에 대해 마음을 다해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오늘(6월 17일)은 ‘양심의 날’입니다. 이날은 포르투갈 외교관 아리스티데스 드 소우자 멘데스의 증거에 영감을 받아 제정됐습니다. 80년 전 그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수천명의 유다인과 억압받는 사람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양심의 자유는 언제나 어디서나 존중돼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 말씀에 비추임 받은 올바른 양심으로 일관성의 모범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외교관 아리스티데스 드 소우자 멘데스와 그의 아내, 자녀들 중 일부의 가족사진 (1917)
외교관 아리스티데스 드 소우자 멘데스와 그의 아내, 자녀들 중 일부의 가족사진 (1917)

아리스티데스 드 소우자 멘데스의 증거

교황의 이번 권고는 지난 1855년 포르투갈 카바나스 드 비리아투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외교관 아리스티데스 드 소우자 멘데스의 생애와 관련이 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얼마 뒤, 그는 프랑스 보르도의 영사로 임명됐다. 거기서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무자비한 나치의 학살을 피해 도망가는 수많은 난민이 있었다. 이 가운데 상당 수가 유다인이었다. 그런데 리스본 정부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 총리에게서 받은 지침은 “국적이 불분명하거나, 분쟁국가 혹은 적국의 국적을 지닌 외국인”을 대상으로 비자 발급을 거부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무국적자와 특히 “고국에서 쫓겨나거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추방된 유다인”에 대해서도 비자 발급을 금지하는 지침이 내려왔다. 하지만 그는 난민, 특히 유다인이 포르투갈과 같은 중립국에 입국을 허가하는 비자를 내줬다.

아리스티데스 드 소우자 멘데스 외교관(좌). 그가 1940년에 발행한 비자(우).
아리스티데스 드 소우자 멘데스 외교관(좌). 그가 1940년에 발행한 비자(우).

어떠한 차별도 없는 비자 발급

1940년 당시 보르도는 나치 독일에 협력한 프랑스 비시 정부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곳에서 포르투갈 영사가 발급하는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사관의 문 앞에 모여들었고, 영사는 불과 3일만에 약 3만 개의 비자를 발급했다. 포르투갈 영사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온 이들 중에는 네덜란드 안트베르펜의 랍비 야콥 크뤼거(Jacob Kruger)도 있었다. 이어 1940년 6월 16일, 아리스티데스는 자신에게 비자 발급을 요청하는 모든 난민에게 비자를 발행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저는 국적, 인종,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비자를 발급합니다.” 포르투갈 영사는 자신의 자녀와 조카들, 랍비 크뤼거의 도움으로 사용 가능한 모든 종이를 이용해 여권에 도장을 찍고 비자를 승인했다.

아리스티데스와 랍비 야콥 크뤼거 (1940)
아리스티데스와 랍비 야콥 크뤼거 (1940)

“우리는 자유를 수호합니다.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모든 인간의 자유, 모든 가정의 자유, 모든 민족의 자유는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종교자유를 위한 히스패닉계와 그 외 이민자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행한 연설, 미국 필라델피아, 2015년 9월 26일)

1950년의 아리스티데스 드 소우자 멘데스
1950년의 아리스티데스 드 소우자 멘데스

열방의 의인

아리스티데스 드 소우자 멘데스는 리스본에서 소환 명령이 떨어졌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제가 불순종해야 한다면,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기보다 인간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1940년 7월 8일 그는 포르투갈로 소환됐고 살라자르 총리 정부로부터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는 직위에서 해임됐고 급여는 반토막이 났다. 또한 국제운전면허증도 취소됐다. 그와 그의 가족은 리스본의 유다인 공동체의 도움으로 생활을 이어갔다. 자녀들 14명 가운데 2명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징집됐다. 아리스티데스 드 소우자 멘데스는 1954년 4월 3일 리스본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병원에서 청빈한 삶을 마감했다. 1966년 그는 ‘세계 홀로코스트 기념 센터(Yad Vashem)’에 의해 “열방의 의인(Giusto tra le nazioni)”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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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6월 2020,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