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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는 기억을 치유하고 봉사하려는 열망에 불을 지핍니다”

“연대의 고리”가 필요하다. 주님은 극심한 실망이나 잘 되어가지 않는 일들에 대한 기억을 다시 낫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기쁨 전달자’가 되게 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6월 14일 오전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제대 뒤편 ‘성 베드로 사도좌’ 제대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며 강론에서 이 같이 말했다.

번역 이창욱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신명 8,2). ‘기억하여라.’ 모세의 이 초대의 말씀으로 오늘 하느님의 말씀이 시작됐습니다. 모세는 곧바로 다시 강조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14절 참조). 성경은 하느님에 대한 망각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을 기억하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시편이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주님의 업적을 생각합니다. 예전의 당신 기적을 생각합니다”(시편 77(76),12). 주님이 우리 각자의 삶 안에 이루신 업적과 기적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좋은 것을 기억하는 게 핵심입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 되고, 실존을 지나치는 “행인”이 되고 맙니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를 길러주는 땅에서 뿌리째 뽑히고,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어디론가 날아가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한다면 아주 강한 유대관계에 새롭게 묶입니다. 한 민족과 함께 숨쉬며, 살아있는 역사의 일부라고 느낍니다. 기억이란 사적인 무엇이 아닙니다. 기억은 우리를 하느님과 타인에게 일치시키는 길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에 대한 기억이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전해져야 했던 이유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이야기해줘야 합니다. 다음의 아름다운 구절이 말해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뒷날, 너희 아들이 너희에게,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모님께 명령하신 법령과 규정과 법규들이 왜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너희는 너희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 종이었다. (역사 전체가 노예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신명 6,20-22). 이 기억을 너희 아들에게 전해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혹시 기억이 전해지는 전달의 고리가 끊어진다면 어떻게 합니까? 전혀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그저 들은 내용만 가지고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시고,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연약한지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유례 없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곧 우리에게 ‘기념제(memoriale)’를 남겨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냥 말만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들은 내용을 쉽사리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냥 성경만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내용을 쉽사리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냥 표징만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맛본 것을 쉽사리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빵’을 남겨주셨습니다. 빵 안에 살아 계시고 참된 그분이 현존하시고, 당신 사랑의 모든 풍미가 담겨있습니다. 빵을 받아 모시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기억해주시는 주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행하여라!’ 성찬례는 단순한 기억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현실입니다. 주님의 파스카는 우리를 위해 다시 현실이 됩니다. 미사 중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 앞에 차려집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곧 ‘공동체로서, 백성으로서, 가족으로서 너희는 함께 모여 나를 기억하기 위해 성찬례를 기념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없이 이를 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상처 입은 기억을 낫게 합니다. 

성찬례는 먼저 우리의 ‘고아 된 기억’을 낫게 합니다. 우리는 거대한 고아원의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성찬례는 고아 된 기억을 치유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애정의 결핍과 극심한 실망만 기억합니다. 사랑받지 못해 고아 된 마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바꾸고 싶어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큰 사랑을 넣어 주시면서 말입니다. 성찬례는 우리를 우리의 고아됨을 다시 낫게 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충실한 사랑으로 이끕니다. 성찬례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줍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덤을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으로 변화시키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삶도 변화시킵니다. 우리를 절대 혼자 있게 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시는 성령의 위로하시는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줍니다. 

성찬례를 통해 주님은 우리의 ‘부정적인 기억’도 치유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종종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쓸모 없을 뿐 아니라 잘못만 저지르고 ‘틀려먹은’ 사람이라고 슬프게 생각하며 좋지 않은 일만 떠올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기억을 치유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 모실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귀한 존재임을 떠올려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잔칫상에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그분이 함께 식사를 나누려고 기다리는 식구입니다. 이는 단순히 그분이 관대한 분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보시고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악과 죄가 우리의 진면목이 아님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 것들은 질병이자 전염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찬례를 통해 그런 병들을 치유하시려고 오십니다. 성체성사에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병든 우리의 기억에 대한 항체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슬픔에 대한 면역을 갖출 수 있습니다. 우리 눈앞에는 언제나 우리의 잘못, 어려움, 집안문제와 직장문제, 실현되지 못한 꿈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깊은 곳에는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격려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의 힘입니다. 이 힘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모셔오는 이(portatori di Dio)’로 변화시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기쁨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미사에 가서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 우리의 슬픔, 우리의 괴로움을 전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기쁨을 전하는가? 우리는 성체를 모신 다음에도 불평하고 비난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한탄하는가?’ 이런 것은 아무것도 개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기쁨은 삶을 변화시킵니다.

마지막으로 성찬례는 우리의 ‘닫힌 기억’을 치유합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품은 상처들은 우리에게도 타인에게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상처들은 우리를 두려워하는 사람, 의심을 품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 상처들 때문에 우리는 처음엔 마음을 닫고, 갈수록 냉소적이고 무관심한 사람이 됩니다. 타인에 대해 거리를 두고 거만한 태도로 반응하며, 이런 방식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고 우리를 가두는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해방시켜줍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행하십니다. 마음을 녹이는 성체의 연약함 안에서 온유하게 우리를 만나러 오시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이기심의 껍질을 깨트리시려고 쪼개진 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비된 마음에서, 우리 내면의 장벽에서 해방되려면 단순히 우리 마음을 열면 된다고 가르쳐 주시고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주님은 빵처럼 단순하게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면서, 쓸데없는 수많은 것들을 좇아가며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를 중독으로 이끌고 우리의 내면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성찬례는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의 불을 끄고 봉사하려는 열망에 불을 지핍니다. 편안한 안락의자의 삶의 방식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우리 존재가 그저 굶주림을 채우는 입이 아니라, 이웃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한 하느님의 손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려 줍니다. 지금은 식량과 인간 존엄에 주린 이들, 일자리가 없는 이들,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보살피는 게 몹시도 절박한 때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빵’이 구체적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진정한 친밀함, 참된 연대의 고리가 필요합니다. 성찬례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와 가깝게 지내는 이들끼리만 가까이 지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기억을 치유하는 기념제를 계속 거행합시다. 미사가 기억, 곧 마음의 기억을 치유하는 기념제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미사는 교회와 우리의 삶에서 으뜸 자리에 있어야 할 보화입니다. 아울러 성체조배를 다시 발견합시다. 성체조배는 우리 내면에서 미사의 효력을 이어갑니다. 우리 내면을 치유하기 위해 성체조배를 한다면 매우 좋을 것입니다. 특히 요즘 시기 우리에게는 이러한 치유가 정말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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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6월 2020, 2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