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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지만, 타협하지 마십시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4월 29일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를 통해 설명한 “참행복”의 마지막 행복선언이다. 교황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복음의 맛”을 잃으면 사람들에게서 경멸을 받는 이유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참행복’에 대한 교리 교육

9.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1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복음적 “참행복”에 대한 교리 교육 여정을 오늘 마무리하겠습니다. 방금 들은 말씀(마태 5,10-12)처럼 마지막 “참행복”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 받는 사람들의 종말론적인 기쁨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마지막 행복은 첫 번째 행복과 동일한 행복을 선언합니다. 곧, 하늘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인 바와 같이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앞선 선언들 안에서 풀어낸 단일한 여정의 끝에 도달했음을 알게 됩니다. 

마음의 가난, 슬픔, 온유, 성덕에 대한 목마름, 자비, 마음의 정화, 평화를 이루는 것.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박해는 궁극적으로 하늘나라에서 기쁨과 큰 보상의 이유가 됩니다. “참행복”의 길은 세상을 따르는 삶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삶으로 이끄는 파스카의 여정입니다. 육에 따르는 삶, 곧 이기심을 따르는 삶에서 성령을 따르는 삶으로 이끄는 파스카의 여정입니다. 

우상과 타협과 자신이 정한 우선순위들이 있는 세상은 “참행복”이 말하는 삶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종종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의 영과는 전혀 다른(요한 14,17 참조) 인간의 기질에 의해 만들어진 “죄의 구조”[1]는 가난이나 온유 혹은 순수함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따르는 삶이 오류이자 문제점이며 곧, 무언가 소외당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들은 이상주의자들이거나 광신자들이야. (…)”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돈을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삶이 선물과 포기 안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은 탐욕 체계에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민폐 혹은 불쾌감”이라는 단어가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인 증거란, 세속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불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책망으로 여깁니다. 거룩함이 나타나고, 하느님 자녀들로서의 삶이 나타나면, 이 아름다움 안에서 그들은 명확한 입장을 취하길 요구하는 어떤 불편함을 느낍니다. 의문을 제기하고 선(善) 앞에 자신을 열거나, 아니면 그 빛을 거부하고 반대와 분노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굳어집니다(지혜 2,14-15 참조). 순교자들을 박해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적대감이 분노로 이어지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롭고 관심을 끕니다. 유럽의 독재자들이 자행한 지난 세기의 박해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증거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거슬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분노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는 박해의 드라마가 세상에 예속되어 있는 것에서부터 성공과 허영 그리고 타협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의 장소임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에서 배척된 사람이 기뻐하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온 세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한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사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르 8,36) 네,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여러 지역에서 박해를 당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환난이 가능한 빨리 중단되길 희망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순교자들이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보다 더 많습니다. 이 형제자매들에게 우리가 가까이 있음을 알립시다. 우리는 한 몸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인 피 흘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입니다. 

우리는 이 여덟 번째 ‘행복’을 피해의식과 스스로 불쌍하다고 느끼는 시각으로 읽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의 경멸이 항상 박해와 동의어인 것은 아닙니다.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소금이) 제 맛을 잃어버리는 것”의 위험을 경고하십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복음의 맛을 잃을 때, 우리의 잘못인 경멸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참행복’의 겸손의 길에 충실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여정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자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실제로 박해자였지만, 자신이 박해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자신이 당하는 박해의 고통을 기쁘게 여기는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콜로 1,24 참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신다면, 배척과 박해는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닮게 하고, 우리를 당신의 수난에 참여시키면서 새로운 삶을 드러냅니다. 이 삶은 우리와 우리 구원을 위해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배척당한”(이사 53,3; 사도 8,30-35 참조) 그리스도의 삶과 동일합니다. 그분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배척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속임수와 타협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도록 우리 마음 안에 많은 사랑을 품을 수 있게 해줍니다. 세상과의 타협은 위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세상과 세상의 생각과 타협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것은, 그러니까 타협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하늘나라의 삶이고, 가장 큰 기쁨이며, 진정한 기쁨입니다. 그리고 박해 안에는 항상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현존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는 예수님의 현존이 있고, 우리가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령의 힘이 있습니다. 복음과 일치하는 삶이 사람들의 박해를 유발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길을 걸어 가는 데 우리를 지탱해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1] 프란치스코 교황, ‘새로운 형태의 연대’라는 주제로 바티칸에서 개최된 워크숍에서의 연설, 2020.2.5. 참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범세계적 무관심에서 기인한 돈의 우상, 탐욕, 부패는 모두 ‘죄의 구조(Le strutture di peccato)’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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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4월 2020, 1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