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주님 수난 성지주일 강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생각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초대하며 성주간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우리가 겪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은 진지한 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우리를 재촉합니다. 섬기지 않는다면 삶도 소용없다는 것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과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번역 이창욱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7 참조). 성주간 동안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내어 맡깁시다. (그 말씀은)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을 종으로 드러내 보입니다. 성목요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종을, 성금요일은 고난 받고 승리하는 종을 소개합니다(이사 52,13 참조). 그리고 내일 성주간 월요일부터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에 관해 이렇게 예언합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다”(이사 42,1). 하느님은 우리를 섬기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섬긴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제일 먼저 사랑하셔서 우리를 아무런 조건없이 섬기신 겁니다. 사랑받지 않고서 사랑하기란 어렵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섬기시도록 우리가 내어 맡기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섬기셨는가?’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우리는 사랑스러우며 비싼 대가를 치른 존재입니다. 폴리뇨의 성녀 안젤라는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나는 너를 농담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하시고, 우리의 모든 악을 몸소 짊어지시게 했습니다. 놀라서 입을 떡 벌리게 만드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은 우리의 악이 그분에게 대들도록 놓아두시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악에) 대응하지 않고 그저 겸손, 인내, 종의 순종만으로, 전적으로 사랑의 힘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이러한 섬김을 지지하셨습니다. 그분을 공격하던 악을 쳐부수시는 대신에 그분의 고통을 지지하셨습니다. 오직 선으로 우리의 악을 이기도록, 사랑이 끝까지 관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끝까지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심에 있어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마저 감내하셨습니다. 곧, 배신과 버림받음입니다.

배신. 예수님은 당신을 팔아 넘긴 제자의 배신과 당신을 부인했던 제자의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당신을 ‘호산나’로 외치며 환호했지만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던 사람들에게 배반당하셨습니다. 부당하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종교제도에 의해, 손을 씻었던 정치상황에 의해 배신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었던 크고 작은 배신을 생각해봅시다. 신뢰가 속임수로 변하는 것을 볼 때는 정말 끔찍합니다. 마음 깊은 데서 실망이 생기고, 그런 이유로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우리에게 진실되고 가까이 있다고 약속했던 사람에게서 배신당하는 것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에게 있어서 배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내면을 살펴봅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솔직하다면, 우리의 불충실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얼마나 많은 거짓, 위선, 이중성이 있습니까! 선한 의도는 얼마나 자주 배신당합니까!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많은 제안들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까! 주님은 우리보다 우리 마음을 더 잘 아시고,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일관성이 없는지, 얼마나 자주 죄에 빠지는지, 다시 일어서려면 우리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어떤 상처가 낫기 힘든지 잘 아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우리를 만나러 오기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호세 14,5). 우리의 불충실을 몸소 짊어지시고, 우리의 배반을 떨쳐버리시면서 우리를 낫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할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낙심하는 대신,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을 향해 시선을 들어올리고, 그분의 포옹을 받으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 저의 불충실이 여기 있사오니, 당신께서 거두어주십시오. 저에게 팔을 벌려주시고, 당신 사랑으로 저를 섬기시고, 계속 저를 도와주십시오. (...) 그러면 저는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버림받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한 구절을, 단지 이 말씀만 하십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아주 강한 문장입니다. 예수님은 도망갔던 당신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아직) 아버지가 남아있었습니다. 이제, 고독의 깊은 심연에서, 처음으로 ‘하느님”이라는 일반적인 이름으로 그분을 부르십니다. 그분에게 “큰 소리로” “어찌하여?”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가장 괴로운 “어찌하여?”라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이 말씀은 사실 시편의 말씀(시편 22(21),2 참조)입니다. 예수님이 극적인 절망 역시 기도 안으로 가져오셨음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시련을 받으셨던 사실도 남아 있습니다. 복음은 그분이 직접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분이 가장 큰 버림받음을 감내하셨음을 증언합니다. 

어째서 이 모든 걸 이렇게 하셨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를 섬기기 위해 그러신 것입니다. 우리가 궁지에 몰렸다고 느낄 때, 막다른 골목에서 빛이나 탈출구도 없이 나갈 곳을 찾지 못할 때,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는다고 보일 때조차도, 우리는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우리와 온전히 연대를 이루기 위해 당신에게는 가장 낯선 상황, 곧 완전한 버림받음을 감내하셨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 여러분을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 위해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혼자 있지 않단다. 나는 네 곁에 항상 있으려고 너의 모든 절망을 겪었단다.”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가장 끔찍한 고통의 심연, 곧 배신과 버림받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오늘날,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산산조각나는 수많은 신념과 배반당하는 수많은 희망 앞에서,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 사랑에 마음을 열어라. 그러면 너를 붙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위로를 느끼게 되리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배신과 버림받음을 감내하실 정도로 우리를 섬기셨던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분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을 우리는 배신할 수 없고, 중요한 것을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나머지 것들은 지나가지만, 이것만이 남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가 겪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은 사소한 것들 속에서 길을 잃지 말고 진지한 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우리를 재촉합니다. 섬기지 않는다면 삶도 소용없다는 것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은 사랑으로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번 성주간 동안, 집안에서 십자가 앞에 머뭅시다. 그리고 바라봅시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을 바라봅시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척도입니다. 목숨을 내어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섬기신 하느님 앞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 섬기기 위해 사는 은총을 청합시다. 고통을 겪는 이, 혼자 있는 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를 만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합시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다’(이사 42,1). 수난 중에 예수님을 붙들어주신 아버지께서는 우리 또한 섬길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사회와 가정에서 사랑하고 기도하며 용서하고 타인을 돌보는 일은 분명 희생의 대가를 치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섬김의 길은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는 승리의 길입니다. 특히 35년 동안 젊은이들에게 봉헌된 오늘 ‘세계 젊은이의 날’에 젊은이들에게도 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벗들이여, 이 며칠 동안 빛을 받는 참된 영웅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은 명성이나 돈을 많이 갖고 있다거나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준 사람들입니다. 목숨을 내어놓도록 부르심 받았음을 느끼십시오. 하느님과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오히려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내어주면서 받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가장 큰 기쁨은 사랑에 대해 ‘만일’이나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네’라고 대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해 ‘만일’이나 ‘하지만’이라고 말하지 않고 ‘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05 4월 2020, 2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