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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tican News

“아무도 뒤처지지 않도록 세상을 재건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19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사시아의 산토 스피리토 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했다. 교황은 우리가 코로나19 대유행의 시기에 힘겹지만 느린 회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관심한 이기주의”라는 혹독한 바이러스가 우리를 공격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련은 “모두의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기회”라고 덧붙였다.

번역 이창욱

지난 주일 우리는 스승님의 부활을 기념했고, 오늘은 제자의 부활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한 주간이 지났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부활하신 분을 뵈었지만, “문이 다 잠겨있는”(요한 20,26) 곳에서 두려워하며 한 주를 보냈습니다. 그 자리에 유일하게 부재했던 토마스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도 주지 못하면서 말이죠. 예수님은 이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힌 불신 앞에서 무엇을 행하십니까? 다시 돌아와 제자들 “가운데” 서시며 동일한 인사를 되풀이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6).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십니다. 제자의 부활은 바로 여기서, 충실하고 인내심 많은 이 자비에서, 넘어진 우리를 일으키시기 위해 지치지 않고 손을 뻗으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와 같이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산해야 할 주인 같은 분이 아니라, 항상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는 우리의 아버지 같은 분이십니다. 걸음마를 시작하지만 (금세) 넘어지는 어린이처럼, 우리는 인생에서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몇 발짝 가다가 다시 넘어집니다. 넘어지고 다시 넘어질 때마다 아버지가 일으켜줍니다. 항상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손길은 자비입니다. 자비가 없다면 우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것이라는 걸 하느님은 잘 아십니다. 걷기 위해서는 홀로 일어설 필요가 있다는 것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계속 넘어집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항상 여러분을 다시 일으켜 세우실 준비가 돼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넘어지는 것을 다시 생각하길 원치 않으시며, 오히려 그분을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넘어지는 가운데 다시 일어서야 할 자녀를 보시고 계신 그분을, 비참 가운데 자비를 통해 사랑해야 할 자녀를 바라보시는 그분을 말입니다. 오늘, 20년 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하느님 자비의 성지가 되길 바라시며 봉헌한 이 성당에서, 우리는 이러한 메시지를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랑과 자비 자체다. 어떤 비천함도 나의 자비보다 클 수 없다”(『일기』, 1937년 9월 14일). 한 번은 성녀가 예수님께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전 생애를 그분께 바쳤다고 만족스럽게 말씀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성녀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너는 진짜 너의 것을 아직 나에게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녀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간직하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그녀에게 상냥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딸아, 너의 비천함을 나에게 다오”(1937년 10월 10일). 우리 또한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께 나의 비천함을 드렸는가? 내가 다시 일어나도록 내가 넘어진 것을 보여드렸는가?” 아니면 아직도 내 안에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죄, 과거에 대한 후회,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상처,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 특정인에 대한 생각 (...) 주님은 당신의 자비를 발견하도록, 우리의 비천함을 그분께 가져가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자들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그들은 예수님이 수난을 받으시는 동안 주님을 버렸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시고도 긴 연설을 하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면으로 상처받은 그들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토마스는 그 상처를 만질 수 있었고 사랑을 발견합니다. 그분을 버렸던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을 겪으셨는지 깨닫습니다. 그분의 상처 안에서 하느님의 애틋한 친밀함을 손으로 만집니다. 늦게 당도했던 토마스가 자비를 껴안았을 때, 그는 다른 제자들을 넘어섭니다. 그는 부활만 믿은 게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이것이 바로 '제자의 부활'입니다. 자신의 상처받고 연약한 인간성이 예수님의 상처 안으로 들어갈 때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거기서 의심이 녹아내리고, 거기서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 되며, 거기서 다시금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 가운데, 우리 또한 토마스처럼 두려움과 의심을 품은 채 나약한 상태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나약함을 넘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분과 함께 우리는 나약함 속에서도 우리들이 얼마나 값진 존재인지를 다시 발견합니다. 깨지지 쉬우면서도 동시에 귀중한, 아주 아름다운 크리스탈 같은 존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만일 크리스탈처럼 우리가 그분 앞에서 투명하다면, 그분의 빛, 곧 자비의 빛이 우리 안에서 빛나고, 우리를 통해 세상 안에서 빛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서간이 우리에게 말한 바와 같이,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베드 1,6)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축일에 가장 아름다운 선포가 가장 늦게 도착한 제자를 통해 이뤄집니다. 토마스, 오직 그 사람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기다리셨습니다. 자비는 뒤처진 이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이제 코로나19 대유행에서 우리가 힘겹지만 느린 회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즉각 이런 위험이 스며듭니다. 곧, 뒤에 남아 있는 이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무관심한 이기주의라는 훨씬 더 혹독한 바이러스가 우리를 공격할 위험이 있습니다. 내게 좋으면 삶이 더 낫고, 내가 잘 돼야 모든 게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바이러스가) 퍼집니다. 여기서 출발해서 사람들을 차별하고, 가난한 이들을 내버리며, 뒤처진 이를 발전이라는 제단 위에서 희생시키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 어떤 경계나 차이가 없다는 점을 떠올려줍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모두 동등하며, 모두 소중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우리를 뒤흔듭니다. 지금은 불평등을 없애고, 온 인류의 안녕을 뿌리 채 위협하는 불의를 치유할 때입니다! 사도행전이 전하고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배우도록 합시다. 그들은 자비를 받았고 자비와 함께 살았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4-45). 이는 관념론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그 공동체에는 오직 한 사람만 뒤에 남았고 다른 이들은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와 반대인 것 같습니다. 인류의 소수만 앞서 나가고, 대다수는 뒤처져 있습니다. 각자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복잡한 문제야. 필요한 사람들을 돌봐야 하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지!”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는 예수님을 만난 다음, 이렇게 일기에 썼습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영혼 안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그들은 기생충이나 짐이 아닙니다. (...) (주님,)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로운 행위를 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회를 남을 판단하는 기회로 이용합니다”(『일기』, 1937년 9월 6일). 하지만 성녀 자신도 어느 날 예수님께 불평했습니다. 자신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지만 순진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고 말이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사람들은 제가 착한 것을 이용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딸아, 그래도 아무 상관없다. 너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너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1937년 12월 24일). 다른 사람 모두와 함께입니다. 우리의 이익, 내 편의 이익만 생각하지 맙시다. 이 시련을 모두의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기회로 받아들입시다. 그 누구도, 아무도 버리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시선 없이는 그 누구를 위한 미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무장해제된 사랑, 예수님의 적개심 없는 사랑이 제자의 마음을 드높였습니다. 우리 또한 토마스 사도처럼 자비와 세상의 구원을 받아들입시다. 아울러 가장 연약한 이를 자비로이 대합시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 새로운 세상을 이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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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4월 2020, 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