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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힘을 지닌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월 5일 오전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참행복’에 대한 교리 교육을 이어나갔다. 교황은 ‘마음(pneuma, 영)’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가난뱅이라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오직 자신의 한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으며, 타인을 위해 생명을 내어 줄 수 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참행복’에 대한 교리 교육:  2. 행복하여라, ‘마음(영)’이 가난한 사람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 함께 마태오 복음이 말하고 있는 여덟 개의 ‘참행복’ 중 첫 번째 행복에 대해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역설적인 선포로, 행복을 위한 당신의 길을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pneuma, 영, 숨, 호흡)’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여기서 놀라운 길이자 ‘참행복’의 이 낯선 대상은 바로 가난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무슨 뜻인가? 만약 마태오 복음사가가 이 단어만 사용했더라면, 그 의미는 단순히 경제적일 것입니다. 곧,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부족하거나 혹은 없는 것,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서는 루카 복음서와는 달리, “영(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 따르면, 영은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불어넣으신 생명의 숨결(창세 2,7 참조)입니다. 우리의 가장 내적인 차원입니다. 우리의 영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가장 내적인 차원인 우리 존재의 깊은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영(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자신이 가난한 사람이며 가난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늘나라에 속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선포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인생에서 무엇 혹은 누군가가 되어야 하고, (…) 이름을 알려야 하고 (…) 그렇게들 말합니다. 여기서 고독과 불행이 시작됩니다. 내가 “누군가”가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고, 나 자신의 자아 때문에 강박관념에 싸여 살게 된다면 고독과 불행이 시작됩니다. 내가 가난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나약함을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을 증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나약함이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과 내가 재물이 아닌 명성으로 부자가 되는 것, 모든 것으로 부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열심히 노력하지만 항상 기본적으로 불완전하고 취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취약성을 감출 수 있는 화장술은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내적으로 취약합니다. 어디가 취약한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한계들을 거부하면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잘 살지 못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면, 거기에 남아있게 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으며,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지만, 자존심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신혼부부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결혼생활을 잘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저에게 물어올 때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법의 단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허락, 감사, 사과입니다.” 이 세 단어는 ‘영’의 가난에서 오는 것입니다. 선을 넘지 말고, 상대방의 허락을 구하십시오. “내가 이것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나요?” 이렇게 해야 가족 간에 대화가 있고, 부부 간에 대화가 이뤄집니다. “당신이 날 위해 이것을 해줬네요. 저에게 필요했던 일이에요. 고마워요.” 그리고 우리는 항상 실수하고 잘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과하기”를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곳에 계신 여러분이나 많은 부부들, 신혼부부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이 세 번째가 가장 어렵다”고요. 왜냐하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과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이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일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용서를 구하는 일에 지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3.3.17. 삼종기도 참조). 용서를 구하는 것을 피곤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는 나쁜 질병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위선적인 모습에 모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단점들을 숨기려고 애쓰며 사는 것은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난하다는 것은 은총의 기회”라고 말씀하시며, 이 힘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가난할 권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한 가지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으로 가난하게 되기 위해 우리가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변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그러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영’으로 “가난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가난뱅이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간조건(Conditio Humana)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재물과 안락을 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왕국들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의 권력, 심지어 가장 큰 제국들조차도 지나가고 사라집니다. 우리는 자주 TV 뉴스나 신문을 통해 힘있고 강력한 통치자나 정부를 봅니다. 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오늘은 사라지고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부와 재물은 사라집니다. 어르신들이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네, 사실입니다. 저는 장례행렬 뒤를 따라가는 이삿짐 차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죽은 후에 재물을 들고 가지 못합니다. 재물들은 이곳에 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반면 이 세상의 왕국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재물과 안락을 누립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있습니다. 참된 선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다스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권능입니다.

그리스도는 무엇으로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셨습니까? 그분은 세상 임금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곧,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힘, 권능입니다. 형제애의 힘, 이웃사랑의 힘, 사랑의 힘, 겸손의 힘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를 행하셨습니다.

여기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과 봉사와 형제애의 힘을 지닌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섬기는 것에 ‘참행복’이 칭송하는 가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아 들여야 하고 우리의 존재 그 자체인 가난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에서 자유로워지도록,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가 구체적으로 찾아 나서야 하는 가난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가난 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마음의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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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2월 2020, 2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