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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주교단 회의 강론 “그리스도인의 새로움은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

프란치스코 교황은 2월 23일 연중 제7일 지중해 인접 국가들의 주교단 회의(2월 19-23일)가 열린 이탈리아 남부 바리에서 거행한 미사 중에, 예수님이야말로 원수까지 사랑하길 요구하신 역사의 가장 위대한 분이라고 강조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극단주의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 유일한 극단주의는 사랑의 극단주의입니다.”

번역 이창욱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인용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마태 5,38; 탈출 21,24).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서 무엇을 빼앗는 사람에게, 여러분도 동일한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율법은 더 나쁜 보복을 금지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큰 발전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악을 행했다면, 동일한 방식으로 되갚을 수는 있지만, 그보다 더 악하게 보복할 수는 없습니다. 분쟁의 매듭을 짓는 것은 분명 한걸음 나아간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더 나아가십니다. 훨씬 더 넘어서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그런데 주님, 어떻게요? 누군가 저에 대해 나쁘게 생각한다면, 누군가 저에게 나쁜 일을 행한다면, 동일한 방식으로 제가 앙갚음하면 안 됩니까?’ 예수님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비폭력을 말씀하십니다. 그 어떤 폭력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결국 악인이 포기하게 만드는 어떤 전략을 추구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이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느님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보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항상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마태 5,45 참조).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다시 말해, “너희는 나처럼 살아가고, 내가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을 부당하게 심판하고 잔인하게 죽였던 이들을 반대하며 손가락질 하신 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그들에게 팔을 벌리셨습니다. 당신의 손목을 못박았던 이를 용서하셨습니다(루카 23,33-34 참조).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길 바란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사랑을 (먼저) 받았기에, 우리는 타인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용서를 (먼저) 받았기에, 용서하라고, 사랑을 (먼저) 받았기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사랑해주길 기다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거저 구원받았기에, 우리가 행하는 선행에서 어떤 이익도 찾지 말라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과장하시는 것 아닙니까?” 더욱이 여러분은 이런 말까지 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이런 말씀도 관심을 끌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겠지만, 정말로 그렇게 하라는 의도는 아닐 거야.”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역설을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고, 말장난을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직설적이고 분명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인용하시고 장엄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이는 주님이 원하신 말씀입니다.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특별히 다른 점입니다. 기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잘하는 사람에게만, 우리의 친구들에게만, 우리의 국민에게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경계와 장벽을 초월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계산하지 않는 사랑의 용기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기준 없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그분의 요구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행동하는 것처럼 처신하는지요! 사랑의 계명은 그저 그런 자극의 말씀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입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해 우리는 어떤 변명의 여지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편안한 자리에서 설교하는 현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러한 현자가 아니셨고, 타협하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극단주의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 유일한 극단주의는 바로 사랑의 극단주의입니다.

여러분의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미사 중이나 미사 후에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되뇌고, 또한 우리를 나쁘게 대하며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들,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들고, 우리에게서 마음의 평화를 앗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적용한다면, 오늘 우리에게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나는, 삶에서 무엇을 걱정하는가? 원수들, 아니면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우려하는가? 혹은 사랑하는 일을 걱정하는가?” 타인의 악행, 그리고 여러분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오히려 예수님의 사랑을 위해 여러분의 마음을 무장해제하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원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배는 증오의 문화와 반대됩니다. 증오의 문화는 불평의 문화와 짝을 이루며 싸웁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우리가 받지 못한 것 때문에, 잘 풀리지 않는 일 때문에 불평하는지요! 예수님은 많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우리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항상 있으며,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저 기도하고 사랑하기만을 요구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수님의 혁명입니다. 증오해야 할 원수에서 사랑해야 할 원수로, 불평의 문화에서 선물의 문화로 바뀌는 혁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이라면, 이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여정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네, 이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상적인 위대함을 이해는 합니다만, 현실의 삶은 전혀 다릅니다! 만일 제가 사랑하고 용서한다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모두가 자기 생각만 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논리가 실패했습니까? 세상의 눈에는 실패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승리입니다. 성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3,18-19). 하느님은 그 너머를 보십니다. 어떻게 이길지 아십니다. 오직 선으로만 악을 이긴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칼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말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승리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힘을 통해 신앙을 지킨다면 패배할 것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셨던 말씀을 우리에게도 되풀이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요한 18,11). 오늘날의 겟세마니, 곧 희망의 고뇌를 가중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무관심하고 불공평한 우리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먼저 칼을 뽑아 휘두르다가 나중에 도망친 그 제자들처럼 행동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해결책은 예수님의 길입니다. 곧, 적극적인 사랑, 겸손한 사랑,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끝없는 당신 사랑을 통해 인류애의 작은 깃발을 들어 높이십니다. 끝으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만일 목표가 불가능했다면, 주님께서 그 목표에 도달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사랑할 힘을 하느님에게 청해야 합니다. 그분께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사랑하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에게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저 혼자서는 해내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타인을 장해물이나 골치 아픈 걸림돌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형제요 자매로 볼 수 있는 은총도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를 위해 도움과 은총을 많이 청하지만, 사랑하는 법은 아주 적게 청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핵심을 살 줄 알도록,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충분히 청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생명이 저물무렵,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으리라”(십자가의 성 요한, 『빛과 사랑의 말씀』, 57). 비록 값비싸더라도, 비록 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지라도, 오늘 사랑을 택합시다. 세속적인 생각에 영향을 받지 않고, 미지근함에 만족하지 맙시다. 예수님의 도전, 사랑의 도전을 받아들입시다. 그러면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고, 세상은 더 인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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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월 2020, 2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