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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시노드 폐막미사 강론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은 희망에 찬 교회의 울부짖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아마존 시노드 폐막미사 강론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 자신이 내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우리의 울부짖음으로 삼으면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께 직접 올라간다”고 설명했다. 또 하느님께 바치는 참된 예배는 “항상 이웃사랑을 거쳐 올라간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신자들이 있다며 슬퍼했다.

번역 이창욱

오늘 하느님의 말씀은 세 인물을 통해 기도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기도하고, 제1독서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기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 바리사이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 하느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는 훌륭한 시작입니다. 가장 훌륭한 기도는 감사의 기도, 찬미의 기도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는 금세 그가 감사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 (…) 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루카 18,11). 그는 감사를 드리는 이유도 설명합니다. 당시엔 단식의 의무가 일년에 한 번이었지만, 그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합니다. 당시엔 가장 중요한 소출에 대해서만 십일조를 바치도록 규정했지만, 그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신명 14,22 참조). 결국 그는 자신이 특별 규정을 잘 이행하고 있기 때문에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태 22,36-40 참조). 자신의 안위, 계명을 준수하는 자신의 능력, 자신의 공적과 자신의 덕목에 대해서만 많은 말을 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춥니다. 이 사람의 비극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 바오로가 말하는 것처럼, 가장 훌륭한 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장 참조). 사랑이 없으면, 결과는 어떻습니까? 결국 기도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칭송합니다. 실제로 바리사이는 주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거나 빚진 것이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오히려 받을 것이 있다고 느낍니다. 그는 하느님의 성전에 있지만, 다른 신을 경배합니다. 곧, ‘나 자신’(이라는 신)입니다. 수많은 “유명한” 단체들이나 “가톨릭 신자들”이 이러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뿐 아니라 이웃을 잊어버립니다. 그는 사실 이웃을 경멸합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이웃은 중요하지 않고 무가치합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말 그대로 “남은 자들, 나머지 사람들”(그리스어로 “loipoi”, 루카 18,11 참조)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잉여 인간들”이고, (우리가) 거리를 둬야 하는 (쓰다 남은) 부스러기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네 삶과 역사에서 얼마나 자주 벌어지는지요!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앞에 있는 사람에게, 바리사이가 세리에게 하듯이, 거리를 두기 위해 장벽을 쌓고, 타인을 가장 쓸모 없이 버려진 사람이 되게 만드는지요! 우리는 그들을 뒤처지고 무가치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전통을 경멸하며, 역사를 말살하고, 땅을 점령하며, 재산을 강탈합니다.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억압과 착취라는 태도로 변하는지요! 심지어 오늘날에도 말입니다! 우리는 아마존 시노드를 통해 아마존 주민들, 민족들, 피조물의 착취, 인신매매, 노예무역에 대해 토론하면서 이를 보았습니다! 과거의 잘못은 타인을 강탈하고 우리 형제들과 우리의 자매인 땅에 상처를 주는 일을 멈추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아마존의 상처 입은 얼굴에서 이를 보았습니다. 나 자신을 경배하는 신앙은 계속되며, 위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경배하는 예식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신자들이고 가톨릭 신앙을 고백합니다만, 그들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자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언제나 이웃 사랑을 거쳐 올라가는 하느님께 바치는 참된 예배를 망각합니다. 심지어 기도하고 주일 미사에 참례하러 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자신을 믿는 이러한 종교의 신자들입니다. 혹시 우리도 누군가를 못났다고 생각하거나 쓸모 없는 사람으로 대우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성찰해봅시다. 그저 말로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를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이 정상이라고 믿지 않도록, 냉소적이고 비아냥대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은총을 청하며 기도합시다. 타인을 험담하고 불평하며, 누군가를 경멸하는 것에서 우리를 낫게 해주시도록 예수님에게 청합시다. 이런 것들은 하느님께서 싫어하십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오늘 이 미사에는 아마존의 토착 원주민들뿐 아니라, 선진국 사회의 가장 가난한 이들과 '라르슈(L'Arch)' 공동체의 장애인 형제자매들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맨 앞줄에서요. 

2. 다른 기도로 넘어가봅시다. 세리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세리는 그의 업적에서 기도를 시작하지 않고 그의 부족함에서 시작합니다. 그의 부유함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의 가난함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경제적 가난이 아니라 삶의 가난을 느낍니다. 죄를 지은 상태에서는 결코 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부자였고 동족들의 희생으로 부당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타인을 착취하던 그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임을 인식했으며, 단지 일곱 마디에 불과했지만 참된 태도에서 우러나온 그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실제로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기도했던 반면(루카 18,11 참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루카 18,13)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이 크시고 자기 자신은 작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슴을 치며”(루카 18,13)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슴 속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는 가슴에서 곧바로 나왔습니다. 그것은 투명합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내어 놓았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거짓 없이, 변명 없이, 합리화 없이, 하느님께서 나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시도록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는 나를 바라보십니다. 자기 합리화로 가득 찬 수많은 참회행위는 우리를 웃게 만듭니다. 이것은 참회라기보다 우리 자신을 시성하는 일(auto-canonizzazione)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악마에게서 나오는 거짓과 어둠은 자기 합리화를 만들고,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빛과 진리가 내 마음을 투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시노드 교부 여러분, 하느님과 형제자매들 앞에서 우리의 노고와 희망을 두고, 솔직하고 진지하게, 진심을 다해 지난 몇 주 동안 대화를 나눈 것이 저는 무척 기뻤고 이에 감사를 드립니다. 매우 훌륭한 체험이었습니다.

오늘, 세리를 바라보며 우리가 어디서 출발해야 할지 다시 발견합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믿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대한 참된 예배를 위한 첫 걸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고대 수도자들이 가르쳐주셨던 것처럼, 모든 영적 잘못의 뿌리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믿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는 것은 유일하게 의로우신 분 하느님을 저버리고 매몰차게 쫓아내는 일입니다. 비유에 나오듯, 가장 경건하며 성전에 헌신적인 사람인 바리사이와, 가장 탁월한 공적 죄인인 세리를 함께 놓고, 이 역설적인 대조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러한 (바리사이와 세리의) 처음의 입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결국) 심판은 역전됩니다. 용감하지만 잘난 체하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불행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들어올려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의 내면을 바라본다면, 우리 안에서 두 사람 모두를, 세리와 바리사이 모두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약간은 세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잘난 체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기 때문에, 약간은 바리사이입니다. 우리는 자기 정당화의 달인들입니다! 이는 타인에게는 가끔 통할지는 몰라도 하느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이 속임수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적으로 가난하고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며 기도합시다. 이를 위해 자주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존재임을 잊지 않기 위해, 내적 가난이라는 분위기 안에서만 하느님의 구원이 활동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자주 찾아가야 합니다.

3. 마침내 우리는 제1독서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의 기도에 도달합니다. 집회서는 가난한 사람의 기도가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집회 35,21)한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기도는 이기주의의 중력에 굴복하여 땅에 남아있는 반면, 가난한 사람의 기도는 하느님께 바로 올라갑니다. 하느님 백성의 신앙감각(sensus fidei)은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하늘의 문지기”를 봅니다. 그 신앙감각이 바리사이의 말에는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활짝 열어주거나, 열어주지 않는 이들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지상의 삶에서는 스스로를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타인보다 먼저 앞세우지 않으며,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자신의 부(富)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예언의 살아있는 이콘입니다. 

우리는 이번 아마존 시노드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발전의 모델인 약탈자들의 위협을 받는 삶의 불안정에 관해 성찰하는 은총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분들은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피조물을 착취할 수단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집으로 살아가고, 손을 벌려 선물로 받아들이며,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우리에게 증언했습니다. 집회서는 바로 그분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집회 35,16)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불편하다는 이유로 얼마나 자주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경청되지 않고, 어쩌면 조롱을 당하거나 침묵을 강요받는지요!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은총을 청하기 위해 기도합시다.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은 희망에 찬 교회의 울부짖음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우리의 울부짖음으로 삼음으로써, 우리의 기도 또한 구름을 거쳐 그분께 올라가리라는 점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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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0월 2019, 2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