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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범아마존 주교 시노드 개막 “담대한 지혜로 성령의 새로움에 충실해야”

아마존에 있는 많은 이들이 무거운 십자가를 들고 교회의 사랑 넘치는 어루만짐을 기다리고 있다. 이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6일 주교 시노드 개막미사에서 (주님께) 받은 사랑의 불꽃을 다시 불태우며 이 지역에 목숨을 바친 사람과 함께 걸어가도록 사목자들을 격려했다. 교황은 최근 아마존 지역을 집어삼킨 불처럼, (지역을) 파괴하는 이해관계에 의해 번진 불은 복음의 불이 아니라고 말했다.

번역 이창욱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인 바오로 사도가 이 “주교 시노드를 하도록” 우리를 도우시며 이 여정에 “함께 걸어 가십니다.” 티모테오에게 쓰신 내용은 하느님 백성을 섬기는 사목자들인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무엇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우리는 ‘하느님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주교들입니다. 합의서에 서명을 했거나, 노동계약서를 직접 받은 것은 아니지만, 머리에 손을 얹어 받은 안수는 주님께 기도하며 들어올린 우리의 손과 형제들을 향해 뻗은 손이 되기 위함입니다. 구매할 수 없고, 서로 교환할 수 없으며, 팔 수도 없는 은사입니다. 받은 은사이며, 주어야 하는 은사입니다. 이를 우리가 자신의 것으로 삼고, 우리 자신을 중심에 둔 채 은사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목자가 아니라 관료 공무원이 되고 맙니다. 은사를 하나의 직업으로 만들어 거저 받은 무상성을 잃게 됩니다. 교회를 섬기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섬기기 위해 살게 됩니다. 반면 우리의 삶은 섬기기 위해 받은 선물(은사)입니다. “쓸모없는 종”(루카 17,10)에 대해 말하는 (오늘) 복음은 이를 상기시켜줍니다. “유익하지 않은 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하기(마태 10,8 참조) 때문에, 우리의 개인적 이익과 유익을 성취하기 위해 봉사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종이 되신 하느님에게서 우리가 먼저 시중을 받기 때문에, 우리의 기쁨은 모두 섬기는 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은사를 중심에 두면서, 섬기기 위해 이곳에 부르심 받았음을 느낍시다.

우리의 부르심, 우리의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성 바오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라고 강조합니다(2티모 1,6 참조).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매우 매혹적입니다. (그리스어) 원어에서 글자 그대로 ‘다시 불태우는 것’은 “불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불길을 일으키다)(anazopurein, 아나조퓌레인)”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하나의 불꽃이요, 하느님과 형제들을 불태우는 사랑입니다. 불은 그 자체로 타오르지 않고, 불꽃이 유지되지 않거나 재로 덮이면 꺼지고 죽습니다. 모든 것이 그와 같다면, 우리가 “항상 그렇게 해왔어”라며 나날이 살아간다면, 은사는 사라지고, 현재상태(status quo)를 유지하려는 걱정과 두려움의 재에 질식되어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결코 그 사목활동을 ‘유지’의 사목에,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있는 이들을 위한 사목에 국한시킬 수 없습니다. 선교사 파견은 하나의 교회 공동체가 성숙했다는 분명한 표지입니다”(베네딕토 16세,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 95항). 교회는 결코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정 중에 있고, 항상 바깥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의 산들바람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은사를 다시 불태우는 불은 은사를 주신 증여자,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합니다.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륭한 것을 지키십시오”(2티모 1,14). 아울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prudenza)의 영을 주셨습니다”(2티모 1,7).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지혜(prudenza)의 영을 주신 겁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가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정지시키는 “세관”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는 그리스도인 덕목이요, 삶의 덕목일 뿐 아니라, 참으로 다스림의 덕목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이 지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지혜를 비겁함과 반대되는 덕목으로 내세웁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교리서가 가르치는 것처럼, 지혜는 “주저나 공포, (...) 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고, (...)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참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실행할 올바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실천 이성을 준비시키는 덕”(『가톨릭 교회 교리서』, 1806항 참조)입니다. 지혜는 망설임이 아니고, 방어적인 태도도 아닙니다. 현명하게 봉사하기 위해, 성령의 새로움에 민감하게 식별할 줄 아는 사목자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 안에서 은사를 다시 불태우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사태가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아울러 성령의 새로움에 충실하다는 것은 기도 안에서 청해야 할 은총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담대한 지혜(prudenza audace)’를 선사하십니다. 선교사명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우리의 주교 시노드가 아마존 지역 교회를 위한 여정을 쇄신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주시길 바랍니다.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솟아오르는 불꽃에 대한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의 불은 타오르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습니다(탈출 3,2 참조). 태워버리거나 집어삼키는 불이 아니라, 빛을 비추고, 데워주며, 생명을 주는 사랑의 불꽃입니다. 사랑 없이, 존중 없이, 사람들과 문화를 집어삼키면, 그 불은 하느님의 불이 아니라 세상의 불입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자주 하느님의 은사가 거저 주어지지 않고 강요되는지, 얼마나 자주 복음화가 아니라 식민화를 하는지요! 하느님께서는 식민주의의 새로운 형태의 탐욕에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최근 아마존 지역을 집어삼킨 불처럼, (지역을) 파괴하는 이해관계에 의해 번진 불은 복음의 불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불은 매력으로 이끌고 일치로 모읍니다. 이윤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눔을 통해서 자라납니다. 반면 오로지 자기 생각만 앞으로 밀고 나가며, 자기 집단을 만들고,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획일화시키기(omologare) 위해 다양성을 태워버리려 할 때, 포식가인 불이 타오릅니다.

은사를 다시 불태워야 합니다. 성령의 담대한 지혜를 받아들이고, 성령의 새로움에 충실해야 합니다.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마지막 권고를 합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복음을 증언하고, 복음을 위해 고통을 겪을 것을, 한 마디로 복음을 위해 살 것을 요구합니다. 복음 선포는 교회의 생명을 위한 최고 기준입니다. 곧 교회의 사명이자,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 2서에서 조금 뒤에 가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2티모 4,6).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생명을 바치는 것이요, 끝까지 증언하는 것이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이고(1코린 9,22 참조), 순교에 이르기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생 동안 순교의 십자가를 졌던 순교자 추기경 형제들이 추기경단에 있다는 데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는 세상의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힘’을 통해서만 복음을 섬길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항상 ‘겸허한 사랑 안에’ 머물며, 정말 생명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사랑을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우리 구원을 위해 꿰뚫린 그분의 성심을 바라봅시다. 바로 거기서 우리를 낳아주신 은사가 샘솟기 때문에, 거기서 시작합시다. 거기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이 나옵니다(요한 19,30 참조). 거기서 우리 각자 모두가 생명을 내어 놓도록 부르심 받았음을 느낍니다. 아마존에 있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복음의 해방시키는 위로를, 교회의 사랑 넘치는 어루만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존에 있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은 생명을 바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우메스(Hummes) 추기경님의 말씀을 반복하고 싶습니다. 추기경님은 아마존 지역의 작은 도시에 도착했을 때, 선교사들의 무덤을 경배하러 공동묘지에 가셨답니다. 아마존에 목숨을 바친 분들을 위한 교회의 (존경의) 몸짓이지요. 그런 다음, 약간 기지를 발휘해서, 교황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들을 잊지 마십시오. 시성될 만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을 위해, 지금 생명을 바치고 있는 이분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분들을 위해, 그분들과 함께, 다같이 걸어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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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10월 2019, 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