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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교황은 5월 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진행된 수요 일반알현 훈화를 통해 그리스어에서 번역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에 대해 설명했다. 교황은 (이 청원의 뜻이 번역본마다 다르고, 그 어떤 번역본도 정확하게 그 뜻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어쨌든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인간 삶의 여정을 위협하는 유혹의 주체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배제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뜻을 같이한다고 설명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주님의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14.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주님의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을 이어갑시다. 이제 ‘주님의 기도’의 끝에서 두 번째 청원인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마태 6,13)에 도달했습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차분하게 시작합니다. 우선, 하느님의 위대한 사업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삶을 바라보게 하고,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것, 곧 “일용할 양식(빵)”을 청하게 합니다. 이어 이기심으로 자주 오염되는 우리의 대인 관계를 다룹니다. 우리는 용서를 청하며, 용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 끝에서 두 번째 청원과 함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우리 대화가, 말하자면 드라마의 핵심 안으로, 곧 우리의 자유와 악의 올가미 사이의 대립 영역 안으로 들어 갑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복음서에 담긴 원래의 그리스어 표현은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현대의 모든 번역은 약간씩 불완전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동일합니다.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인간 삶의 여정을 위협하는 유혹의 주체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배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유혹과 함정에 빠지게 하시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종류의 해석은 무엇보다도 본문 그 자체와도 대립되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느님의 모습과도 거리가 멉니다. ‘주님의 기도’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질투하고, 인간과 경쟁하고, 인간을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을 즐기는 그러한 신(神)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많은 이교도 신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봅니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야고 1,13). 오히려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시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생선을 달라는 자녀에게 뱀을 주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루카 11,11 참조). 그분은 인간의 삶에서 악이 나타날 때 거기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도록 인간 편에서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편에 서서, 항상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합니다.

시험과 유혹이라는 두 순간은 예수님 삶 안에서 신비스럽게 공존했습니다. 이러한 체험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거의 스캔들과 같은 방식으로, 완전히 우리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이 복음 대목들은 ‘주님의 기도’를 마무리하는 가장 어려운 청원들이 이미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홀로 남겨 두지 않으셨으며, 예수님 안에서, 당신께서 극단적 결과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때 우리와 함께 하셨으며, 평생 동안 우리와 함께 계시며, 기쁨과 시험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슬픔과 실패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죄를 지을 때도 함께 계십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시고, 우리를 버려둘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의 형제애를 거부하고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권능을 원하면서 악을 행하려는 유혹을 받는다면,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이 유혹에 맞서 싸우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에 대해서는 복음서들의 시작 대목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무리 가운데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 사막으로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사탄으로부터 오는 유혹과 함께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됩니다. 그곳에 사탄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왜 옛날 이야기인 사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까?” 하지만 복음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사탄과 대결하셨고,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고, 승리를 거두십니다. 마태오 복음에는 예수님과 적(악마)의 싸움이 끝나는 것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

또한 하느님께서는 최악의 시험 때도 우리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겟세마니에 가셨을 때, 당신의 마음이 형언할 수 없이 괴롭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고독과 홀로 버림받음을 겪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당신의 어깨에 짊어지는 책임을 가지고 혼자 계셨습니다. 시험이 너무 괴롭기 때문에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당신 자신을 위해서만 사랑을 갈구하지 않으시지만, 그날 밤 예수님의 영혼은 죽을 것 같은 슬픔을 느꼈던 것이죠. 그래서 당신의 친구(제자)들의 연대를 청하십니다.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태 26,38). 우리가 알고 있듯이, 제자들은 두려움에 싸여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고뇌의 시간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버리지 말라고 청하시지만, 사람들은 잠들어 버립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향한 시험을 알 때, 하느님께서는 깨어 있으십니다. 우리 삶의 최악의 순간과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그리고 가장 괴로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와 함께 싸우시며,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합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의 고통의 밤과 예수님의 투쟁의 밤은 (예수님) 육화의 마지막 봉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고통의 골짜기와 역사를 뒤흔드는 모진 고난 안으로 우리를 찾으러 내려오십니다.

시련의 시간에 우리의 위안이 있습니다. 그 심연의 계곡은 예수님께서 건너가신 이후로는 더 이상 황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아드님의 현존으로 축복받았음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위안입니다.

‘오, 하느님, 시험과 유혹의 시간을 저희에게서 멀리해 주십시오. 하지만 시험과 유혹의 시간이 우리에게 올 때, 우리 아버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 당신께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십자가의 무게를 짊어지셨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당신 사랑을 신뢰하면서 예수님께서 당신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가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고맙습니다.

01 5월 2019, 1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