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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은 특권입니다”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교황청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네 번째 사순 특강을 “경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했다.

Amedeo Lomonaco / 번역 안주영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한밤중에 한줄기 빛’을 잡는 것이며, ‘해안선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바다’에 빠져드는 것처럼 (하느님의 위엄 안으로) 빠져드는 것이고, ‘하느님의 무한한 심연’에 잠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위대함과 아름다움, 선을 인식하는 것이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신부는 4월 5일 금요일 교황궁 내 구세주의 어머니 성당에서 교황과 교황청 관료들을 위한 네 번째 사순 특강 주제인 “주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여라”에 대해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주님의 현존 앞에서의 침묵

칸탈라메사 신부는 경배라는 용어가 처음에는 누군가를 향한 존경과 복종의 상징으로 얼굴을 땅을 향해 낮추는 행위를 나타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러한 외형적 의미는 여전히 복음서들과 요한 묵시록에서도 사용됐다고 말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성모님에게도 드릴 수 없는, 오직 하느님께만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종교적인 행위입니다.” 이어 그는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의 표현을 떠올리면서 경배한다는 것이란 “침묵의 찬미가를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마음을 잠잠하게 하길 원한다면 더욱더 단순하고 짧은 단어, 예컨대 ‘아멘’이 도움을 줍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놓아두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경배하면서, 진리가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경배가 “엎드리고 침묵하는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경배와 함께 자신과 자신의 영광, 자기충족을 바치고 희생합니다. 경배하면서 불의에 갇혀있는 진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경배를 통해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미리 체험하는 것입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물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며 평화를 얻고, 새가 바람을 따라 날며 기쁨을 발견하듯이 경배하면서 경배하는 이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인간은 경배하기 위한 존엄한 무언가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경배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배는 인간에게 필요합니다.”

성체 조배

칸탈라메사 신부는 경배의 특별한 형식인 성체 조배에 대해 설명했다. “성체 조배는 서방 교회에서 11세기에 활성화되기 시작한, 비교적 최근에 이뤄진 그리스도교 신심 행위입니다.”

“성체 성사를 통해 현존하시는 예수님 또는 그분의 이콘 앞에 고요히 침묵 가운데 머물면서 나의 계획들이 그리스도의 계획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내려놓으십시오. 하느님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관통하고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푸른 잎과 같이

성체 조배를 통해 “봄이 오면 나뭇가지들에게 광합성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나뭇가지에서 푸른 잎들이 돋아나 태양 광선 아래 대기를 통해 양분을 빨아들이고, 나무로서 ‘자리를 잡고’ 성장하게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푸른 잎들이 없다면 나무로 성장할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을 것이며, 우리가 숨쉴 수 있는 산소를 재생하는데 공헌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푸른 잎처럼 돼야 합니다.”

숨겨진 은총들

칸탈라메사 신부는 주세페 운가레티 시인을 인용했다. “시인은 어느 날 아침 바닷가에서 일출을 바라보고 영감을 얻어 단지 세 개의 단어로 이뤄진 짧은 두 절의 시를 썼습니다. ‘무한함이 나를 밝힌다(Mi illumino d’immenso).’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앞에서 경배하는 이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구절입니다. 이렇게 경배하는 이들의 영혼을 통해 교회 위에 내리는 숨겨진 은총이 얼마나 많은지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가톨릭 성령 쇄신 운동

칸탈라메사 신부는 1967년에 시작된 가톨릭 성령 쇄신 운동이 50년 동안 수많은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새롭게 했다며 교회 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새로운 현실을 불러 일으킨 점을 기억했다.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의미에서 교회 운동의 하나가 아니라 온 교회를 향한 은총의 물결이었고 절실히 필요했던 ‘성령의  주입’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성체 조배가 “복음화의 형태이자 가장 효율적인 형태 중 하나”라고 말했다.

“많은 본당과 공동체가 매일 혹은 매주 일과 시간에 성체 조배를 하며 이를 체험합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저녁에 혹은 밤에 불이 켜진 교회의 성체 앞에서 침묵 중에 조배하는 이들을 보고 교회로 들어가 잠깐 머물게 됐고, ‘여기에 하느님이 계십니다!’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종말론과 예언 사이의 경배

“그리스도인의 관상은 자신의 내면을 찾길 원하면서 배꼽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항상 두 가지 시선의 만남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고개를 숙여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다음과 같이 특강을 마무리했다. 성체성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는 순간에 이루신 예언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요한 19,37).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영원히 누릴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맛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하나의 예언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종말론적이고 예언자적인 행위입니다. 마침내 어린양은 더 이상 속죄 제물로 바쳐지지 않을 것이며, 어린 양의 고기도 먹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곧, 봉헌과 성찬은 멈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에 대한 묵상은 계속될 것입니다.”

05 4월 2019, 2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