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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시련 속에서 우리 자신을 아버지께 의탁하는 방법을 예수님에게서 배웁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17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진행된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 시간을 통해 예수님께서 수난 중에 아버지께 기도하신 말씀들에 대해 설명했다. 교황은 이번 성주간 동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곧 사랑을” 살 수 있는 은총과 “아버지께 의탁하는 방법을 알 수 있는” 은총, 그리고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용서하고 용서할 줄 아는 용기를” 찾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고 말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시련 속에서 아버지께 하는 기도

“시련 속에서 우리 자신을 아버지께 의탁하는 방법을 예수님에게서 배웁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최근 몇 주 동안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파스카 성삼일을 앞둔 오늘은 예수님께서 수난 중에 아버지께 기도하신 말씀들에 대해 살펴봅시다.

첫 번째 기도는 최후의 만찬 후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청하십니다. 수난이 눈앞에 와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요청을 하십니다. 어떤 영광에 대한 것입니까? 성경에서 영광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심을 가리킵니다. 또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구원적 현존의 확실한 표징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을 결정적인 방법으로 나타내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이를 파스카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셨으며, 영광스럽게 되셨습니다(요한 12,23-33 참조).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남아 있는 마지막 베일을 벗기고, 전례 없이 우리를 놀라게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이 전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사랑은 모든 한계와 척도를 넘어서는 순수하고 열광적이며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만듭시다. 우리 눈에서 베일을 없애주시길 아버지께 청합시다. 왜냐하면 성주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자비로우신 구세주 라기보다는 엄격한 심판관으로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부활절 때,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는 사랑의 겸손 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시며 (우리들과의) 거리감을 없애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처럼, 주님을 위해, 사랑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살고, 마음을 다해 모든 것을 할 때, 우리는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콜로 3,17 참조). 참된 영광은 사랑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광은 세상의 영광과는 반대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고, 찬사를 받고, 환호를 받을 때 옵니다. 내가 관심의 중심에 있을 때 오는 겁니다. 반면, 하느님의 영광은 역설적입니다. 곧, 박수 소리도 없고 청중도 없습니다. 중심에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활절 때 성자께서 성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동안, 성부께서도 성자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그 누구도 자신을 영광스럽게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어떤 영광을 위해 사는가?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기만을 원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것뿐 아니라 주기도 원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후에 겟세마니 동산에 가십니다. 그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은 잠시도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군인들과 함께 오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두려움과 고뇌”를 느끼기 시작하셨습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고뇌를 느끼신 겁니다. 배신, 경멸, 고통, 실패에 대해 고뇌를 느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슬퍼” 하시며, 깊은 심연 속에서, 절망 속에서, 아버지께 가장 부드럽고 달콤한 말인 “압빠(Abba)”, 곧 아빠라고 부르면서 청하십니다(마르 14,33-36 참조). 예수님께서는 시험 중에 아버지와 포옹하라고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안에서는 고통 중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의 기도는 위로와 신뢰와 위안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적인 절망 안에 있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홀로 있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십니다. 반면, 우리는 우리의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처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느님께 의탁하거나 우리의 진정한 선익인 하느님의 뜻에 의탁하기보다는, 자주 혼자 있기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시험 중에 우리 자신 안에만 갇혀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터널을 파는 것이고, 점점 더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오직 한 방향을 향한 고통스러운 내향적 여정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입니다. 고독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관계이고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의탁하십니다. 느끼는 것을 아버지께 드리며, 투쟁 중에 아버지께 기대시면서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탁하십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겟세마니가 있습니다. 그것을 갖고 있거나,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겟세마니에 들어 갈 때 다음을 기억합시다. 각자의 겟세마니에 들어 갈 때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것을 기억합시다.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것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세 번째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 지 모릅니다”(루카 23,34).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악독했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복음은 이 기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 일어났다고 명시합니다. 그 순간은 아마 예수님의 손목과 발에 못이 박히는 가장 심한 고통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고통이 절정에 이른 여기서 사랑도 절정에 이릅니다. 용서에 이릅니다. 곧, 악의 고리를 파괴하는 또 다른 힘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성주간 동안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다음과 같은 은총을 청합시다. 곧, 매일매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은총, 사랑으로 사는 은총입니다. 시험 중에 아버지께 의탁할 줄 알고, 아버지께 “아빠”라고 말할 수 있으며, 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용서하고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이 두 가지는 함께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있는 힘도 우리에게 주십니다.

17 4월 2019, 2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