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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특강 (자료사진) 사순 특강 (자료사진) 

“우상들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아졌습니다”

교황궁 내 구세주의 어머니 성당에서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신부가 프란치스코 교황과 교황청 관료들을 대상으로 세 번째 사순 특강을 진행했다. 묵상 주제는 “우상숭배, 살아 계신 하느님께 맞서는 모순”이었다.

Barbara Castelli / 번역 안주영

카푸친 수도회 소속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신부는 3월 29일 금요일 프란치스코 교황과 교황청 관료들을 위한 세 번째 사순 특강에서 “우리 삶의 참된 과업”은 온갖 형태의 우상숭배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회심”이라고 말했다. “우상숭배와 맞선 싸움은 유감스럽게도 역사적 이교사상의 종식과 함께 종결된 것이 아니라 항상 진행 중입니다. 우상들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습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금송아지”

교황궁 내 구세주의 어머니 성당에서 칸탈라메사 신부는 바오로 사도가 우상숭배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심오한” 분석을 했다고 설명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전후의 인류의 상황”에 초점을 맞췄다. 곧, “구원 여정이 시작되는 시점”을 구분했다. 구원의 여정은 “아무 것도 없는 것(zero)이나 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깊숙한 곳(sottozero)에서부터, 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곧 “이교도와 신앙인”이라는 두 범주로 나뉘어진 세계에서, “불경과 불의 속에서” 선조들의 “근본적인 죄”를 규명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불경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한편,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느님께 드려야만 할 존경을 표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했다. 이는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하느님의 존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경건하고 신심이 깊은 이들의 착각

칸탈라메사 신부는 “바리사이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충격을 직접 겪었으므로 바리사이의 율법 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주며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바오로 사도는 경건하고 신심 깊은 이들에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별난 착각의 정체를 밝혀주었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명확한 개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타인에게는 율법을 적용할 줄 알았지만, 자신들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선’과 ‘인내’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며 예외를 적용했던 이들의 착각의 정체를 밝혀주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듣고 떠난 이들도 있고 개종한 이들도 있으며 마음이 완고해진 이들도 있었습니다.” 죄인인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이해한 이들도 있었지만, 마음이 더욱더 완고해져서 “고집이 세지는 이들”도 있었다.

우상숭배의 새로운 형태와 회심

칸탈라메사 신부는 ”창조주의 자리에 피조물”을 놓고 “자신의 업적”을 숭배하는 “신심 있는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는 숨어 있는 우상 숭배가 있다”고 말했다. 그 피조물은 “내가 지은 집이나 교회가 될 수도 있으며, 내가 이룬 가정이나 내가 세상에 출산한 아들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상숭배의 근저에는 자기 숭배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추앙하고 사랑하며,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두며, 첫 번째 자리에 자신을 놓고, 다른 모든 것들은 자신을 위해 희생시키는 자기 숭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마태 12,3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우상이 무엇인지 밝혀 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을 배우면 됩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할 때 얼마나 많이 ‘나(io)’라는 말로 시작하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우상숭배의 결과가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고 항상 오로지 자기 자신을 칭송하는 불경함”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줄기가 높게 자란 나무는 큰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줄기 아래 기둥을 세운 원뿌리는 나무를 견고하게 세워주고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데 큰 도끼로 원뿌리를 치지 않으면 곁뿌리들을 잘라낸다고 해도 나무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자기 자신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면, 가장 근본적인 회심은 우리를 똑바로 세우고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서는 것이라고 칸탈라메사 신부는 설명했다.

“나의 ‘나’와 맞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두면, 하느님과 동맹을 맺고 동일한 적에게 함께 대항하므로 승리가 보장됩니다. 우리의 ‘나’는 물 밖으로 버려진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여전히 꿈틀거리며 발버둥치겠지만 결국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죽음이 아니라 탄생입니다.”

29 3월 2019, 1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