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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ANSA)

교황, 파나마 밤샘기도 “‘네’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밤샘기도를 바치기 위해 파나마시티 메트로파크에 운집한 60만 명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면서, 하느님의 “인플루언서”인 마리아를 본받으라고 강조했다.

번역 김근영

사랑하는 젊은이 친구들, 안녕하세요!

우리는 생명의 나무에 관한 이 아름다운 프레젠테이션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이 ‘러브 스토리(love story)’라는 것을, 우리 삶의 토양에 뿌리를 내려 뒤섞이고 싶어하는 ‘삶의 역사(life history)’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삶은 “클라우드(cloud)”에 구원을 올려놓고 사람들이 다운로드 받기를 기다리는 최신 “앱”이라거나 정신적인 자기계발의 기법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삶은 최신 뉴스를 찾아주는 “튜토리얼”도 더더욱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우리 개개인의 스토리와 뒤섞인 그 ‘러브 스토리’의 일원이 되라는 초대입니다. 그것은 살아있으며, 우리 가운데서 태어나길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씨를 뿌리시고 싹을 틔우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에 “네”라고 말씀하신 첫 번째이시며, 항상 우리를 앞서 가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역사에 “네”라고 말씀하신 첫 번째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네”라고 말하길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그분께서 첫 번째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마리아를 놀라게 하신 방식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마리아를 이러한 ‘러브 스토리’의 일원이 되라고 청하셨습니다. 확실히 그 나자렛의 젊은 여인은 당시 “소셜 네트워크”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인플루언서(influencer, 소셜 네트워크상의 영향력 있는 개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원하지도 않았고 노력하지도 않았음에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의 확신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인플루언서”라고요. 단순히 몇 마디로 마리아는 “네”라고 말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유일한 힘인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오늘날 우리 모두는 우리의 내면을 새롭게 하기 위해 하느님을 모셔야 합니다. 이렇게 묵상해봅시다. ‘나는, 하느님이 나의 내면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그 젊은 여인의 “네”, 그러니까 천사에게 말한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의 힘에 항상 감명을 받습니다. 이는 단순히 수동적인 수락도 아니고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글쎄, 한 번 해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미지근한 “네”와는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봅시다”라는 표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네”라고 말하면서 곧바로 그 지점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며 헌신할 준비가 된 사람의 “네”였습니다.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을 아는 확실성보다 더 안전한 것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 각자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 여깁니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내 마음 안에는 무슨 약속이 있는가?’ 마리아의 약속은 의심할 바 없이 어려운 미션이 될 터이지만, 눈 앞에 닥친 도전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물론 상황이 복잡해지겠지만, 사전에 그 상황이 확실하거나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비겁한 행동이 우리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마리아는 보험증권을 받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위험을 무릅썼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마리아는 강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리아는 “인플루언서”, 곧 하느님의 “인플루언서”입니다! 그 “네”와 섬기려는 열망은 의심과 어려움보다 강렬했습니다.

오늘 오후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네”가 어떻게 모든 세대에 울려 퍼지고 퍼지는지에 관해 들었습니다. 마리아와 같은 수많은 젊은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우리에게 증언해준 에리카와 로젤리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그들은 용감했고 박수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딸 이네스의 탄생과 관련해 맞닥뜨려야 했던 위험과 두려움과 어려움을 우리와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와 같은 부모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질병이나 장애를 안고 태어난 자녀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네, 사실입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들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딸이 태어났을 때,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딸을 사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딸이 태어나기 전에, 모든 문제들에 부딪혔을 때, 그들은 결심했고, 마리아처럼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딸을 사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미약하고 무력하며 도움이 필요한 딸의 인생에 대한 에리카와 로젤리오의 대답은 “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네스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믿음에 용기를 지녔던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주님께 “네”라고 말하는 것은 연약함, 소박함, 그리고 종종 짜증이나 갈등으로 점철되어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뜻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에리카와 로젤리오가 말한 것과 같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의 가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약점과 결함을 지닌 우리 친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완벽하거나 순수하거나 “정제된” 것만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애가 있거나 허약한 사람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습니까?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장애인이나 허약한 사람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습니까? [젊은이들이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잘 들리지 않는데요. (…) [“아니오!”] 또 다른 질문입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대답하는지 봅시다. 외국인이 된 사람, 실수를 한 사람, 아프거나 감옥에 있는 사람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습니까? [“아니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센병 환자, 시각 장애인, 중풍병자, 바리사이, 죄인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도 죄수를 받아들이셨고, 심지어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도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냐하면 오직 사랑받은 사람만 구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구원할 수도 없고,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떤 상황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받은 사람만이 구원될 수 있습니다. 함께 따라해볼까요? 사랑받은 사람만이 구원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더요. [젊은이들이 “사랑받은 사람만이 구원될 수 있다”고 외친다] 잊지 맙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분의 본성에 반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는 그분을 거스르는 온갖 것을 할 수 있지만,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사랑받은 사람만이 구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여진 사람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문제나 약점이나 결함보다 더 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문제나 약점이나 결함을 통해서 이 ‘러브 스토리’를 쓰고자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방탕한 아들을 받아들이셨고, 당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항상, 항상, 항상 우리를 받아들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일어나서 제 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왜냐하면 최악의 타락이란, 주목해서 들어주십시오. 그 최악의 타락은 우리의 삶을 망치고, 넘어진 채로 머물며, 우리 스스로를 도움받을 수 있게 내어놓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등산하면서 부르는 아름다운 알프스 노래가 있습니다. “등산의 기술에서, 승리는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채로 머물지 않는 것이다.” 넘어진 채로 머물지 마십시오.

그래서, 첫 번째 단계는 다가오는 삶을 환대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본 생명의 나무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나눠주고 증언해준 알프레도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저는 그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건설 프로젝트 업무를 시작했지만, 그 일이 끝나고 나면, 저는 직업이 없어지고 상황은 급속하게 변합니다. 교육도 없고, 거래도 없고, 직업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고 바싹 마르게 하는 것을 이 네 가지 “없는(without)”으로 요약해봅시다. 직업이 없고, 교육이 없고, 공동체가 없고, 가정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뿌리 없는 삶입니다. 직업이 없고, 교육이 없고, 공동체가 없고, 가정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죽이는 네 가지 “없는” 입니다.

우리를 땅에 단단히 붙들어주고 우리를 지탱해주는 굳건한 뿌리가 없다면 우리가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꽉 움켜쥐고 꼭 붙들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표류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우리, 나이든 사람들, 여기 있는 우리 각자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 물음은 여러분 젊은이들이 우리 나이든 사람들에게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이든 사람들은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제공하는 뿌리는 무엇인가? 젊은이들이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해 우리가 제공하는 기반은 무엇인가?’ 이는 우리 나이든 사람들을 위한 물음입니다. 우리가 젊은이들로부터 직업, 교육, 공동체, 기회 등을 빼앗을 때, 젊은이들을 비판하고 비난하기가 쉽습니다. (직업, 교육, 공동체, 기회는) 젊은이들이 뿌리를 취하고 미래를 꿈꾸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교육 없이는 미래를 꿈꾸는 게 어렵습니다. 가정과 공동체 없이는 미래를 꿈꾸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꿈꾸는 것이란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에 대한 물음 뿐만 아니라 내가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가에 대한 물음, 곧 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그분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나이든 사람들이 직업, 교육, 공동체,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알프레도가 말한 것처럼, 직업 없이, 교육 없이, 공동체 없이, 가정 없이는, 마지막에 가서는 상실감이나 공허한 느낌을 갖게 되고, 그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무익한 것으로라도 채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싸워나가며 사랑하기 위한 그 누군가를 더 이상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계신 나이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를 따라온 사람들에게 저는 다음과 같이 묻겠습니다. ‘미래를 세우고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위한 영감을 장려하는 데 있어서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젊은이들이 교육, 직업, 가정, 공동체를 가질 수 있도록 확실한 노력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나이든 사람들 각자는 마음 속에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왜 오늘날 수많은 젊은이들은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나요? 왜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믿는 데 어려움을 겪나요? 왜 젊은이들은 지루해 보이고 삶의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요?” 저는 그들의 생각을 되물었습니다. 당시 저를 감동시킨 특별한 대답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알프레도가 나눈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부님, 수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타인을 위해 존재하길 그쳤습니다. 가끔 그들은 투명인간(invisible)처럼 느낍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그들이 타인을 위해, 가정을 위해, 사회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길 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종종 투명인간처럼 느낍니다. 이는 버림받음의 문화이며 타인에 대한 관심의 부족입니다. 모든 사람들까지는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기여할 것이 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참여를 요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젊은이들은 오래 전부터 그들의 형제자매나 사회를 위해 존재하길 그쳤는데, 그들이 어떻게 하느님의 존재를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마약의 손아귀에 빠져 젊은이들을 파괴하는 미래를 보지 말라고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습니다. “내가 본 젊은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그들을 비판하는가, 아니면 그들에게 무관심한가? 나는 그들을 도울 것인가, 아니면 무관심할 것인가?” 오래 전에 존재하기를 그친 것이 나에게 진리로 다가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인정받고 사랑받는 느낌을 잘 알지만 하루 종일 연결돼 있다는 느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존중받고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는 것은 단순히 “온라인” 존재가 되는 것보다 위대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손과 마음과 머리로 공간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큰 공동체의 일원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공동체는 여러분을 필요로 하고 젊은이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이러한 점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요한 보스코 성인을 생각해 봅시다. [젊은이들이 박수친다] 성인은 먼 곳에서 젊은이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 돈 보스코 성인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여기서 볼 수 있군요, 박수칩시다! 돈 보스코 성인은 먼 곳이나 특별한 곳에서 젊은이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단순히 하느님의 눈으로, 그 도시에서,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성인은 교육받지 못하고 직업이 없으며 공동체의 도움이 없는 채로 남겨진 수많은 젊은이들과 아이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과 똑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젊은이들을 비난하기 일쑤였고, 하느님의 눈으로 젊은이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으로 젊은이들을 보아야 합니다. 돈 보스코 성인이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인은 ‘그 자체로 주어진 삶을 받아들임으로써’ 첫 걸음을 내디딜 에너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다음 성인은 젊은이들과 함께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꾸려 젊은이들이 일하고 공부하게 함으로써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두 번째 단계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젊은이들에게 천국에 닿을 수 있도록 뿌리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들은 사회에서 의연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꼭 붙잡을 수 있는 뿌리를 젊은이들에게 제공하고, 그들의 길에 처음으로 폭풍우가 몰아칠 때 안전하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기. 이것이 바로 성 요한 보스코가 한 일입니다. 이것이 성인의 일입니다. 이는 젊은이들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공동체가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이든 여러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눈으로 젊은이들을 보시겠습니까? [“네!”]

저는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지역이 ‘그리스도의 커다란 가정집(familia grande hogar de Cristo)’으로 불리는 것을 생각합니다. 다른 도시들과 동일하게, 그들은 다가오는 삶을, 그 총체성과 복잡성 안에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가 항상 희망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린다 해도 움이 트고 싹이 그치지 않습니다”(욥 14,7).

“싹이 트고 자라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것은 따뜻한 집과 공동체가 있을 때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집과 공동체는) 우리를 뿌리내리게 해주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신감을 주며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줍니다. 사랑받는 아들딸이 사명을 찾고 발견하며 위탁 받은 새로운 지평 말입니다. 참된 얼굴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마리아처럼 이 ‘러브 스토리’에 “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도시의 거리를 걸을 수 있는 교회 공동체를 우리의 이웃들에 건설하고,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며, 그 관계와 엮이는 방식에 “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1세기의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은 뿌리를 지키는 수호자, 곧 우리의 삶이 허무로 소멸되거나 증발되는 것을 막는 수호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우리가 타인의 일부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의 수호자가 되십시오. 우리가 속해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한 수호자 말입니다.

이는 니르민이 크라쿠프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에서 경험한 것과 같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환대하는 활기차고 행복한 공동체를 발견했습니다. 그 공동체는 그녀에게 소속감과 정체성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을 통해 발견한 기쁨을 누리게 했습니다. (사실) 니르민은 예수님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녀는 그분을 피했습니다. 그녀는 뿌리를 보기 위해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때까지, 그녀에게 소속감을 줄 때까지,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 공동체는 그녀가 우리에게 말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언젠가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한 성인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회의 진보란 단순히 최신 자동차를 소유하거나 시장에 나온 첨단 기기를 구매하는 것으로만 구성되는가? 이런 것들이 인간 존재로서의 위대함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 이런 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성 알베르토 우르타도, 1946년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주간 묵상 참조) 이에 저도 젊은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식의 위대함을 원합니까? [“아니오!”]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으시는군요. 여기서는 잘 들리지가 않는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오!”] 위대함이란 단순히 최신 자동차를 소유하거나 시장에서 최신 가전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을 위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이를 이해하시고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리카와 로젤리오도 이를 깨닫고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니르민도 이를 깨닫고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두 우리가 여기서 들은 것들입니다. 젊은이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네”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네!”] 네, 이제서야 여러분이 (제대로) 대답하는 방법을 배웠군요. 고맙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세상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아프고 연약하고 허약한 이들이나 노인들의 숫자나 죄인들의 숫자가 적어지는 방식으로는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요.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는 나아지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에게 말했던 이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아질 때, 미래의 탄생을 끌어오기 위해 용기를 지니고 모든 것을 변하게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힘을 믿는 이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나아질 것입니다. 젊은이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마리아와 같은 “인플루언서”가 되길 바랍니까? [“네!”] 성모님께서는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용기를 지니고 계십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듭니다. 논쟁하고 약자를 괴롭히며 자신만의 연구에 몰두하는 방식으로는 어렵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며 충만하게 해줍니다. 나머지 것들은 좋을 수는 있지만 무익한 속임수일 뿐입니다.

조금 뒤에 우리는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분명 여러분은 그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족, 고국의 다양한 상황들 말입니다.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여러분의 마음을 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지니십시오. 그분께서 당신 사랑의 불꽃으로 새롭게 하시도록, 그분께서 여러분의 온갖 약점과 결함들과 함께 삶을 기꺼이 품어 안을 수 있도록, 온갖 장점과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존재의 아름다움과 깨어있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시길 빕니다. 살아있음과 깨어있음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러브 스토리’의 일원이 되길 원한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위대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만나실 때, 저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도 삶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 뿌리를 잘 돌볼 수 있도록, 그리고 마리아처럼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27 1월 2019, 1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