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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시신을 매장하는 이들 위한 교황의 기도... 영적 세속성을 묵상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16일 토요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에서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매장하는 이들을 기억했다. 교황은 강론에서 세상의 영과 영적 세속성에 대해 설명했다. 세속성은 덧없는 문화이며 신의를 모르고 십자가의 무게를 인내하지 못하며 교회를 파괴하려 한다. 오직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세속성을 이겨낸다.

번역 박수현

지향

오늘(5월 16일)은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매장하는 일에 종사하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합시다. 고인을 매장하는 일은 자비로운 선행 중 하나이지만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감염을 감수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강론

예수님은 여러 차례, 특히 사도들과 작별하시며 위안을 주실 때, 세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18-21 참조).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15,18). 이는 곧 예수님을 향한 증오, 그리고 우리를 향한 그 증오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당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서 하신 당신의 기도에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지 마시고 세상의 악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하십니다(요한 17,15 참조). 

저는 우리 각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영(spirito del mondo)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과 당신의 제자들을 증오하고 멸망하게 할 수 있는 이 세속성이란 무엇인가? 제자들과 교회를 타락시키는 이 세속성은 무엇인가? 세상의 영은 어떠하며 무엇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하나의 삶의 명제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세속성인가?” 하지만 어느 누군가는 세속적인 것이란 잔치를 벌이고 휴일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것은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세속성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그것은 덧없는 문화입니다. 뽐내는 문화이고, 겉만 치장하는 문화입니다. “오늘은 맞지만, 내일은 아니고, 오늘은 아니지만 내일은 맞다”고 말하는 그런 문화입니다. 다시 말해 피상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를 모르는 그러한 문화는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타협하고 협상하려고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속된(mondana)’ 문화이며, ‘세속성(mondanità)’의 문화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이것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강조하시고, 이런 세속적인 문화에서 우리를 지켜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세속성의 문화는 편의에 따라 버리는 문화입니다. 이러한 문화는 신의가 없으며 뿌리가 없는 문화입니다. 아울러 이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지만 동시에 세속적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떨어지는 씨앗의 비유를 통해 세상의 걱정, 그러니까 세속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질식시키며 (씨앗을) 자라나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8,7참조).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이 세상의 정령들 아래에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갈라 4,3 참조). 저는 앙리 드 뤼박 신부님의 저서 『교회에 관한 묵상』의 마지막 쪽을 읽을 때면, 항상 (세속성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됩니다(앙리 드 뤼박, 『교회에 관한 묵상』, 밀라노, 1955 참조). 그리고 마지막 세 쪽에서 드 뤼박 신부님은 정확하게 영적인 세속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곧, 세속성이란 교회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악이라는 것입니다. 드 뤼박 신부님은 (결코) 과장하지 않고 끔찍한 몇몇 악에 대해 말하면서, 이 가운데 최악의 악이 영적 세속성이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세속성은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삶의 해설이고, 삶의 방식이며,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사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속성에 반하는) 사도들의 복음 전파 앞에서 (세속적인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복음을) 증오하고 없애려 합니다.

신앙을 증오하는 이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에 관해 말할 때, 실제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증오가 신학적 문제로 인한 것이라고 여겨졌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세속성이 예수님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을 증오하고 없애려 했습니다.

어쩌면 세속성에 대해 의문을 품으며 저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이것은 삶의 피상적인 부분이지 않습니까. (...)”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세속성은 전혀 피상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깊은 뿌리, 아주 깊은 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카멜레온과 유사합니다.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지만 본체는 동일합니다. 말하자면 어디든 스며들며 교회 내부까지도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삶의 명제입니다. 세속성과 세속적인 자기합리화는 ‘그렇게 되기 위해’ 겉모습을 바꾸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로 가서 그곳 아레오파고스에서 많은 신들에게 바치는 신상과 기념 기둥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에 대해 말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이어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들은 사도를 추문하고는 떠나갔습니다(사도17,22-33 참조). 이처럼 세속성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스캔들입니다. 세속성은 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영적 세속성에 맞서 대응하는 유일한 치료약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스캔들이며 (세속적인 눈이 보기엔 쓸데없이 남을 위한 희생했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입니다(1고린 1,23 참조).

이런 까닭에 요한 사도가 쓴 첫 번째 서한에서 세상에 대한 주제에 대해 말할 때,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1요한 5,4)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단 하나, 우리에게 유일한 것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광신적인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더욱이 모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소홀히 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스캔들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어리석음과 그리스도의 승리에서도 신앙의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요한 사도는 ‘이것은 우리의 승리’이며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부활 주간의 마지막 시기와 성령 9일 기도를 통해 우리 모두 세속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복음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은총을 성령께 청합시다. 또 세상이 예수님을 증오하듯 우리를 증오하기에 우리가 이런 세속성에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영에서 지켜주시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요한17,15 참조).

영적 영성체(신령성체) 기도문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께서 진실로 성체 안에 계심을 믿나이다.

세상 모든 것 위에 주님을 사랑하오며,

주님의 성체를 영하기를 간절히 원하나이다.

지금 주님의 성체를 영할 수 없다면 적어도 영적으로라도 제 안에 오소서.

주님, 성체를 모실 때처럼

주님과 온전히 일치하려 하오니

영원히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의 영적 영성체(신령성체)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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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5월 2020,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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