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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Vatican Media)

“정부 위해 기도하고,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맙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3월 12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을 통해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가운데 정책 결정을 내리는 정부 관계자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초대했다. 또 이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굶주리고 있는 어린이들, 전쟁 피난민들을 잊지 말자고 호소했다.

VATICAN NEWS / 번역 김호열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어려운 순간에 성령께 봉헌된 산타 마르타의 집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모두와 계속 함께했다. 이날 미사는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된 네 번째 미사다. 교황은 이날 미사 지향으로 특별히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초대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지만, 우리 모두 감염된 환자들, 가족들, 집에서 어린이들을 돌보는 부모들을 위해 (…) 특별히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 계속 함께 기도해주시길 여러분에게 요청합니다. 그들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국민들이 좋아하지 않는 조치를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모두의 선익을 위한 일입니다. 종종 그들은 외롭고 국민의 이해를 얻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우리의 국가 지도자들이 필요한 조치를 내릴 수 있도록, 국민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교황은 미식가인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에 관한 이날 복음(루카 16,19-31)을 설명하면서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 특히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거나 전쟁을 피해 도망쳐 나왔지만 아무런 도움 없이 막막한 상태에 처한 어린이들을 외면하지 말자고 호소했다. 다음은 교황의 강론 내용.

“예수님의 이번 비유 말씀은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매우 분명하고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단지 한 사건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이처럼 살게 될 가능성과 또한 우리 모두가 이처럼 살게 될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흡족해 합니다. 옷을 잘 차려 입을 줄 알았고, 아마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스타일리스트가 만들어 준 옷을 원했을 것입니다.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잘 지냈습니다. 매일 호화로운 만찬을 즐겼습니다. 이처럼 그는 행복했습니다.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었습니다. 예방 차원에서 만찬을 즐기기 위해 콜레스테롤 예방약을 먹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는 만족했습니다. 평안하게 지냈습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상황이 부자에게 있어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 하지만 이 사람은 (…) 인생이란 그런 것이지,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지.’ 복음은 (더이상) 말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기껏해야 부자는 이따금씩 라자로에게 무언가를,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삶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법칙인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부자도 죽고, 라자로도 죽었습니다. 복음은 라자로가 천국으로 올려져서 아브라함 곁에 앉았다고 말합니다. (…) 부자에 대해서는, 그냥 ‘부자도 죽어 묻혔다’고만 말합니다. 끝입니다. 그렇게 끝났습니다.”

“두 가지가 충격입니다. 우선 부자는 (자기 문 앞에) 가난한 사람이 있었으며, 그의 이름이 라자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업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저에게 큰 충격을 주는 것은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큰 구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부자와 라자로가 살아 있었을 때 둘 사이에 존재했던 것과 동일한 골짜기입니다. 이 골짜기는 두 사람이 죽은 후에 시작된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 있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이 부자의 드라마가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지만 닫힌 마음을 가진 드라마입니다. 이 부자가 알고 있는 정보들은 그의 마음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감동할 줄 몰랐고, 다른 사람들의 드라마에 마음이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식탁 시중을 드는 아이를 불러 ‘이것저것을 (…) 저 가난한 사람에게 가져다 주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보가 마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드라마입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는 뉴스와 신문에서 보고 들으면서, 오늘날 세상에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기아로 고통받고 있는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약품도 없고 학교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 대륙이 이러한 드라마를 보여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 불쌍한 사람들 (…)’이라고 계속 생각할 뿐입니다. 그 정보는 우리 마음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과 많은 남녀 그룹들이 생각하는 것, 알고 있는 것, 느끼는 것 사이의 분리를 경험합니다. 머리에서 마음이 분리된 것입니다. 이들은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라자로의 고통을 외면했던 부자처럼 말입니다. 무관심의 골짜기가 존재합니다. 제가 람페두사를 처음 방문했을 당시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무관심의 세계화(la globalizzazione dell’indifferenza)’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오늘 이곳 로마에 있는 우리도 걱정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가게들은 문을 닫은 것 같은데, 내가 필요한 것을 사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매일 산책도 해야 하는데, (…)’ 이처럼 내 것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배고픈 아이들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엾은 피난민들을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아와 전쟁에서 도망쳐 나와 자유를 찾아 여러 나라의 국경으로 모여들었지만, 결국엔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강철과 철조망으로 만든 장벽만 마주합니다. 이러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우리 마음에 다다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무관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보를 얻어 잘 알고 있지만, 이웃의 현실을 느끼지 못하는 드라마입니다. 이것이 바로 골짜기입니다. 무관심의 골짜기입니다.”

“충격적인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이 가난한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라자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자 역시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저승에서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한 것을 보면, 그가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곳에서 그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라자로를 보내주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부자의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에서 그저 ‘형용사’나 ‘수식어’로 불리고 꾸며질 뿐입니다. 부자이고 힘있는 사람이고 (…) 여러 ‘형용사’로만 불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서 이기심을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과 이름을 잃게 하고, 우리를 한낱 ‘형용사’나 ‘수식어’로만 평가하게 만듭니다. 이 와중에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를 부추깁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가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에 있지 않고, 우리가 소유하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 등에 있는 ‘형용사’ 혹은 ‘수식어’의 문화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무관심은 우리를 이러한 것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곧, 이름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냥 부자들이며, 이러저러한 사람들이며, 타인입니다. 우리는 ‘형용사’이자 ‘수식어’들입니다.”

“오늘 주님께 무관심에 빠지지 않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고통에 관한 모든 정보가 우리 마음에 다다라,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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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3월 202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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