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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VaticanMedia)

“하느님의 선물은 구매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교회 경력을 쌓으려고 영향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월 21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하느님의 선택이 무상으로 베풀어진 것이며 우리는 이를 충실히 지키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Debora Donnini / 번역 이창욱

그리스도교 신자, 사제 혹은 주교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신 선물이다.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고) 구매하는 것이 아니다. 또 성덕이란 우리의 공덕 때문이 아니라 무상으로 받은 이 선물을 “지키는” 데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월 21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교황은 이날 전례의 화답송인 시편 89(88)편과 제1독서(1사무 16,1-13 참조)에서 묵상을 시작했다.

시편 89(88)편은 사울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내신 다음,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다윗을 뽑으신 일을 떠올린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의 아들 중 하나에게 임금으로 기름을 부으라고 파견하신다. 기름을 붓는 도유는 하느님의 선택을 나타내며 오늘날에도 사제, 주교를 축성하기 위해 사용된다. 교황은 우리 그리스도인도 세례성사 때 성유로 도유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느님은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고 말씀하신다며, 사무엘에게 겉모습에 그치지 말라고 초대하셨다고 설명했다.

교황은 당시 일어났던 사건을 되짚었다. 다윗의 형제들은 이스라엘 왕국을 지키기 위해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웠고 “공을 세웠지만”, 주님께서는 그들 중 막내를 선택하셨다. 그는 형제들이 필리스티아인들과 어떻게 싸우는지 보려고 전쟁터에 갈 수는 있었지만, 양떼를 치라고 보내진 “근심 많은 소년”이었다. 그는 다윗이라 불렸고,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1사무 16,12)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무엘더러 그에게 기름 부으라고 말씀하셨고,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1사무 16,13). 

하느님 선택의 무상성

이 사건은 주님께서 왜 “매일 기도했던” 신심 깊은 소년이 아니라, 어쩌면 “여느 소년들처럼 어린이 같은 행동을 했던” 평범한 소년을 선택하셨는지 자문하도록 우리를 부추기고 묵상으로 이끈다. 게다가 그는 “자기보다 더 공을 많이 세웠던” 일곱 명의 용감한 형제가 있었다. 교황은 그럼에도 가장 어린 막내가 뽑혔다고 강조했다. 전쟁에서 싸워보지도 않았으며, “직함도 없었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으며, 가장 부족한 막내”가 뽑힌 것이다. 이는 “하느님 선택의 무상성”을 드러낸다.

“하느님께서는 선택을 하실 때, 당신의 자유와 무상성을 보여주십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를 생각해봅시다. 어째서 주님께서 우리를 뽑으셨을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이라서, 그리스도교 문화에 속하기 때문에 (…)’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 그리스도교 문화에 속한 이들이 주님을 배척하고, 또 주님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기 있는 우리를 주님께서 선택하셨을까요? 거저 베푸신 겁니다. 우리가 어떤 공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상으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제, 주교들은 사제나 주교가 되기 위해 어떤 값을 치른 게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닙니까? 물론 다음과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곧, 성직매매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 이 자리 저 자리, 더 높은 자리에 이르기 위해 (…) 꼭대기로 올라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려고, 소위 교회 경력을 쌓아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것, 세례 받은 사람이 되는 것, 사제와 주교로 서품 받은 이가 되는 것은 순전히 거저 받은 무상성 덕분입니다. 주님의 선물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선물을 간직하십시오

성령의 도유는 거저 받은 무상성이다. 따라서 교황은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성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교 성덕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선물을 간직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선물을 베푸시는 분으로 언제나 남아계시고”, 나는 “나의 공덕”을 내세우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사업에서, 일터에서, 많은 경우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이런 공무원에게 말하고, 저런 정부인사에게 말하며, 여기저기에다 말합니다. (…) ‘저를 어떤 자리로 보내달라고 상사에게 말씀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죠. 선물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높이 올라가려는 욕망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것, 사제가 되는 것, 주교가 되는 것은 오로지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우리는 어떤 공덕이 아니라 우리의 겸손한 태도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우리는 이 선물을 간직해야 하고,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선택으로 도유됐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게 했고, 사제가 되게 했으며, 주교가 되게 했던 이 도유를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성덕입니다. 다른 것은 소용없습니다. 지키기 위해 겸손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선물을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선물은 무엇입니까? 성령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뽑으셨을 때,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순수한 은총입니다. 순전히 은총입니다. 우리의 공덕 때문에 받은 게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을 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교황은 마지막으로 다윗이 “양떼를 치러”, “자기 백성을” 돌보러 갔음을 다시 강조했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자가 아닌 민족도 포함해, 하느님 백성을 잊는다면, 만일 우리 사제들이 우리의 양떼를 잊는다면, 만일 우리 주교들이 이들을 잊고 다른 이들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하느님의 선물을 부정하는 겁니다. 마치 성령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가십시오. 저리 멀리 가버리십시오. 편안히 성삼위 안으로 들어가서 쉬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는 선물을 간직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다윗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 감사를 드리고, 이토록 위대하고, 이처럼 아름다운, 이 선물을 깊이 깨달으며, 우리의 충실성을 통해 이 무상성, 이 선물을 지키는 은총을 주님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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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월 202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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