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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Vatican Media)

“불평하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애틋한 사랑으로 위로하시고 벌도 내리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월 10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을 통해 이날 독서에서 제기된 “주님께서는 어떻게 위로하시고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는가?”라는 질문에 답했다. 교황은 하느님께서 용서를 청하러 다가오는 이를 어루만지시며 화해의 은총을 열어주시는 착한 목자라고 말했다.

Alessandro Di Bussolo / 번역 이창욱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인도하시고 위로하시지만, “새끼 양을 품에 안고 어미 양에게로 온유하게 데려다 주시는” 목자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애틋한 사랑(tenerezza)으로 백성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고 벌을 주기도 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월 10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을 통해 이날 독서에서 제기된 “주님께서는 어떻게 위로하시고 어떻게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는가?”라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교황은 제1독서에 나오는 이사야 예언자의 ‘이스라엘의 위로’에 해당하는 부분이 사실 “희망의 선포”로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이사야 예언자는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이사 40,1-2)라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주님께서는 위로 받도록 내어 맡기는 이를 위로하십니다

교황은 “우리가 위로 받도록 우리 자신을 맡겨드리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위로를 통해 우리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지만, 어떻게 바로잡아 주십니까?” 교황은 이같이 질문을 구체화하면서, “당신 두 팔로” 양떼를 모으시고, “새끼 양을 품에 안으시며”, 온유하게 “어미 양에게로” 데려다 주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에 대해 말하는 이사야 예언서의 다른 구절을 읽었다. 교황은 강론을 듣고 있던 청중에게 “품에 안고”라는 구절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얼마나 애틋한 사랑이 묻어나는 구절입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애틋한 사랑으로 (위로하십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벌을 내리십니까? 애틋한 사랑으로 (벌을 내리십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죄를 지은 다음, 주님의 품에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이끄시며, 주님께서 잘못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애틋한 사랑으로 벌도 내리십니다. 하느님의 애틋한 사랑, 하느님의 어루만짐(으로 말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교육적 태도라거나 외교적 태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이 다가올 때 기뻐하십니다. 그분의 기쁨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 기쁨이 그분을 애틋하게 만듭니다.”

죄인 앞에서 주님의 기쁨은 애틋한 사랑이 됩니다

교황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를 떠올렸다. 그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멀리서도 (알아) 보았다”(루카 15,20 참조). 아들을 기다렸기 때문에, “아들이 돌아오는지 보려고 테라스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들은 집에 당도하자 “참회의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아버지는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오히려) 잔치를 벌였다. 교황은 “주님의 애틋한 사랑이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다시금 강조했다. 이날 미사의 복음에는 양 1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은 목자가 다시 등장한다. 교황은 다음 구절을 읽었다.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2-13). 이것이 바로 “죄인 앞에서 주님께서 느끼시는 기쁨”이다. “우리가 용서받으려고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그분께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 앞에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기쁨을 느끼신다. 

불평하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십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가 지닌 어려움을 불평합니다. 악마는 우리가 슬픔에 빠지기를 바라고, 삶을 괴로워하거나 혹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괴로워하기를 바랍니다.” 이어 다음의 일화를 떠올렸다. “불평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투덜이’라고 불리던 어떤 수도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노벨 불평 상을 탈 정도였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불평하고, 불만을 터뜨리는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의 죄나 우리의 한계가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거기서,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위로한다. 나는 아주 가까이 있단다.’ 그리고 우리를 애틋한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 곧 영웅이신 하느님께서, 말하자면, 우리의 형제가 되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자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어루만지실 수 있었던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마라.’”

나인의 과부처럼 아버지께서 위로하시도록 우리를 맡깁시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이어 말했다. “‘울지 마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께서는 얼마나 큰 애틋한 사랑으로 나인의 과부를 어루만지셨습니까”(루카 7,13 참조). 어쩌면 아들의 관 앞에서, ‘울지 마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그녀를 어루만지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재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위로를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용서의 은총”이 따르기 때문이다.

“‘신부님, 일생 동안 저는 많은 죄를 지었고,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느님께서 위로하시도록 당신을 내어 맡기십시오.’ ‘그런데 누가 저를 위로합니까?’ ‘주님이 위로하십니다.’ ‘그러면 제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용서 청하러 가야죠. 자, 어서 가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문을 여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분께서 어루만져주실 겁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로서, 형제로서, 애틋한 사랑을 갖고 가까이 다가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마치 양떼에 풀을 먹이며 두 팔로 양떼를 모으고, 새끼 양을 품에 안고 온유하게 어미 양에게로 데려다 주시는 목자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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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2월 201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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