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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가 전하는 주님 수난, 죽음, 부활

피렌체 출신 화가 조토 디 본도네의 파도바 스크로베니 성당 벽화를 통해 파스카 성삼일과 주님 부활 신비를 묵상한다. 이 벽화는 그리스도교 미술의 독특한 예로 섬김, 직무, 봉사의 사명을 표현하고 있다. 그 아름다움은 복음의 진리를 나타낸다.

Paolo Ondarza / 번역 이정숙

심오한 의미를 숨기고 있는 단순한 이야기다.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는 초월적 요소가 서정적인 힘으로 나타나는 구체적 인간의 이야기다. 파스카 성삼일의 복음은 파도바 스크로베니 성당(Cappella degli Scrovegni) 벽화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돼 있다. 그것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버전의 “신곡(Divina Commedia)”이라고 할 수 있다. 승천과 성령 강림의 영광으로 정점에 이르고, 최후의 만찬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를 표현한 이 벽화는 성당 벽 아래 부분에 각각 열두 장면으로 구성돼 있다. 벽화는 파도바의 은행가 엔리코 스크로베니(Enrico Scrovegni)의 의뢰에 따라 토스카나 출신의 위대한 거장 조토가 1303년부터 1305년에 걸쳐 완성했다. 성당 벽화의 상단부에 각각 배치된 요아킴과 안나, 동정 마리아, 예수님의 어린시절과 공생활을 표현한 장면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한 쌍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는 덕과 악습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징들이 “세 개의 구역”으로 배치돼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조토 속으로 들어가기

(우리는) 조토의 작품 앞에서 단순히 관람객으로 남지 않고 참여하게 된다. 이타카 출판사가 출간한 『조토 - 스크로베니의 성당(Giotto. La Cappella degli Scrovegni)』의 저자 겸 미술사학자 로베르토 필리페티(Roberto Filippetti)는 조토가 “700년 전 직관적 원근법을 발명해 우리로 하여금 그림 속으로 들어가도록 가르치고, 인물들의 표정과 심오한 느낌을 통해 표현된 이야기와 우리가 일치되도록 3D 형태로 벽화를 그렸다”고 설명했다. 그러한 느낌은 당시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벽화는 향수를 자아내는 기억이 아니라 기념비적인 것이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

예컨대 벽화의 (위에서) 두 번째 줄 마지막 전 장면은 예루살렘 입성이 묘사돼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올리브 가지를 꺾기 위해 나무를 오르는 어린이들, 그리고 메시아가 지나는 길에 망토를 깔고 있는 군중의 일원이 되는 기분이 든다. 메시아는 어깨와 등에 십자 모양이 특징인 몬테 아미아타(Monte Amiata)의 당나귀를 타고 있다. 어린이에게도 조토의 작품에서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 게 일상화된 필리페티 교수에게 300년대 화가의 붓에서 불러낸 성주간의 독서에 우리와 동행하길 청하자.

성목요일

필리페티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신의 등 뒤의 어두운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아 은돈 서른닢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배신 장면이 있는 성당의 커다란 아치에서 출발합니다. 파스카 성삼일은 성체성사의 제정과 발 씻김이 담긴 최후의 만찬 그림 두 점과 함께 세 번째 줄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금색 망토를 입은 베드로 앞에서 무릎을 꿇으십니다. 금색 망토는 베드로에게 맡겨진 큰 위엄을 입증하죠. 조토는 사도들 뒤편의 벽에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꽃이 핀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또한 원죄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모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품위 있게 드러내는 발 씻김을 준비하는 동안, 발가락 사이를 깨끗이 하기 위해 검지 손가락을 발가락 사이에 끼운 유다가 한 ‘상징적인 행동’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금요일

토스카 출신의 거장 조토는 성금요일에 여섯 장면을 할애했다. 가장 생기 있는 장면은 올리브 동산에서 유다의 입맞춤인 <야외에서(en plein air)>라는 장면이다. 두 주인공의 주변은 소란스럽고 혼란스럽다. 파란 하늘의 바탕색 위에 막대들, 창들, 횃불들이 서로 교차하고 있다. 돌발행동으로 말코스의 귀를 자른 베드로의 모습이 눈에 띈다. 또 다른 성금요일 장면은 산헤드린에서 초록색 옷을 찢는 카야파와 그 앞에 서있는 예수님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스도의 뺨을 때리는 붉은 망토의 경비병이 있고, 세 번이나 메시아를 부정한 사도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후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음 벽화는 가시나무 관을 쓰고 왕들이 입는 황금 옷을 입은 그리스도가 “열두 명의 무뢰한들”로부터 침 뱉음과 모욕으로 조롱을 받고 있다. 필리페티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메시아를 조롱하고 있는) 공간의 창문 너머에는 검은 하늘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화가의) 시간착오를 통해 (빌라도의 관저) 위로는 부활의 승리를 예고하는 푸른 하늘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음 장면으로 조토는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을 그렸다. 간수들이 “끌고 떠미는” 엄청난 십자가의 무게를 지고 갈바리아(골고타)로 오르시는 예수님이 있으며, 예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동정 마리아는 눈물로 가득합니다.”

십자가형의 고통에 대한 표현의 힘

이어 “극심한 고통의 십자가형의 형상”이 나타난다. ”찢겨진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솟아나는 붉은 피와 금빛 물은 성찬례의 예표인 (천사가 들고 있는) 성작에 담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붉은 핏방울은 긴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리며, 이를 막달레나가 닦고 있다. 피는 십자 나무 아래에 있는 아담의 두개골까지 흘러내린다. “또 다른 특별한 세부묘사는 갈바리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두개골이 새로운 의미로 태어난다는 것이며, 안구(眼球)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 요한은 거의 실신한 동정녀를 부축하고 있으며, 반대편에는 악당들이 튜닉(솔기 없이 통으로 짠 긴 옷)을 서로 차지하려고 제비뽑기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서 후광이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띈다. 그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고 영원한 삶을 보장받은 백인대장이다. 아울러 하늘에는 열 천사가 울면서 날고 있다. “예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많은 표현주의적 신랄함과 힘으로 고통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성토요일, 절규하는 침묵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온 공허로 인해 하늘과 땅의 얼굴들은 애도를 표한다. 성토요일은 침묵의 날이다. “절규하는 침묵, 내부가 무너지는 고통의 날입니다. 성모님은 아드님을 끌어안으십니다. 서로 맞닿은 두 후광(예수님과 성모님)은 심장 형상을 하고 있죠. 동정녀의 자세는 조토의 또 다른 작품인 <예수님의 탄생(Natività di Gesù)>에서 표현한 바와 동일합니다. 처음엔 (예수님을) 포대기에 감싸서 구유에 뉘였지만, 이제는 신도네(sindone,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로 된 천)로 감싸서, 베로나의 분홍 대리석으로 된 무덤에 모시게 될 것입니다.”

부활 주일

부활 새벽의 첫 번째 빛은 “나를 붙들지 마라(Noli me tangere)”로 특징지어진다. “우리는 정원에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분은 흰 옷을 입으시고, 조금 전 막달레나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녀는 그분을 알아보고 ‘라뿌니(Rabbunì), 스승님!’이라고 외쳤습니다.” “부드러운 눈길로, 그러나 강한 긴장감과 함께 여인의 팔은 예수님을 향해 뻗어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그 긴장을 막으십니다. ‘나를 붙들지 마라(non mi trattenere).’” 필리페티는 “화가는 이 두 사람 사이에 상징적인 식물표본을 그렸다”며, 그것들은 “월계수, 로즈마리, 파슬리, 티모, 마요라나, 향기나고 치료하는 식물들로 영원한 거룩함과 구원의 향기를 뜻한다”고 설명했다.  

조토의 신학자

그렇다면, 이처럼 완벽한 도상학적 프로그램의 연출가는 누구일까? 필리페티에 따르면, 1300년 대희년 당시 교황청 서기장이며 훗날 비첸자교구장으로 임명된 렌디나라시 출신 알테그라도 데 카타네이(Altegrado de’Cattanei) 주교가 그 주인공이다. “개인적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한 것과 같은 모더니즘 미술의 사상은 아니었지만, 중세의 공방은 신학자와 화가가 각각 협력하며 하느님의 생각과 손길을 공유했습니다.”

그리스도교 미술, 섬김이자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성경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미술은 섬김, 봉사, 직무로 이해된다. 미술은 “가난한 이들의 성경”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읽거나 쓰지 못하고, 오직 볼 수만” 있었기 때문이다. 조토가 우리의 가장 내밀한 감정을 계속 건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리페티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설명을 마쳤다. “인간의 마음은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고 하느님을 갈망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님 위해 우리를 내셨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내 영혼이 평안하지 않다는 겁니다. 불안은 객관적으로 아름답고 복음을 반영하는 이러한 미술을 통해 평화와 기쁨을 발견합니다."

18 4월 2019, 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