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  (ANSA)

파롤린 추기경 “교황님에게 협상은 항복이 아니라 정의롭고 항구적인 평화를 위한 조건”

프란치스코 교황이 스위스 공영방송 RTS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언급한 데 이어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이 3월 12일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와의 인터뷰를 통해 핵전쟁 위협이 커지고 있다며 교황의 입장을 해명했다. 인터뷰 전문을 싣는다.

Vatican News

「바티칸 뉴스」는 3월 12일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에 게재된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과 잔 귀도 베키 기자가 나눈 인터뷰 전문을 싣는다.

이하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과 나눈 일문일답:

추기경님, 교황님이 항복이 아닌 협상을 촉구하고 계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왜 두 당사국 중 한쪽만, 그러니까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만 언급하신 걸까요? 침략당한 당사국의 “패배”를 협상의 동기로 삼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지 않나요?

“교황청 공보실장이 지난 2월 25일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했던 것처럼, 교황님은 ‘정의롭고 항구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외교적 해법을 위한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호소하셨습니다. 그러한 여건 조성에 대한 책임은 당사국 중 한쪽에만 있는 게 아니라 양쪽 모두에게 있다는 것, 그 첫 번째 조건은 침략을 종식하는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교황님께 던진 질문에 대한 맥락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황님은 답변하시면서 협상, 특히 협상에 나설 용기를 강조하셨습니다. 교황님이 항복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죠. 교황청은 이러한 노선을 추구하며 ‘휴전’을 끈질기게 촉구하고 있는데, 특히 침략자가 먼저 공격을 멈추고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협상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라고 설명하십니다. 협상은 항복이 아니라 용기를 뜻합니다. 아울러 교황님은 인간의 생명과 유럽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이 전쟁으로 희생된 수십만 명의 인명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이스라엘 성지와 세계를 피로 물들이는 다른 분쟁에도 적용됩니다.”

외교적 해법에 다다를 가능성이 아직도 있나요?

“인간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외교적 해법에 다다를 가능성도 항상 남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비극을 초래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또한 이 전쟁을 종식하고 외교적 해법에 다다르기 위한 가능성과 책임이 있습니다.”

교황청은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나요? 추기경님도 서방 국가들의 개입설을 두고 ‘두렵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교황청은 전쟁 확산의 위험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분쟁의 격화, 새로운 무력충돌 발발, 군비경쟁은 이와 관련해 극적이고 불안한 조짐입니다. 전쟁 확산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고통에 새로운 고통, 새로운 죽음, 새로운 희생자, 새로운 파괴가 더해진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어린이, 여성, 노인, 민간인들이 이 부당한 전쟁의 값비싼 대가를 몸소 치르게 될 것입니다.”

교황님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관련해 당사국의 ‘책임’을 언급하셨죠. 두 상황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두 상황은 위험할 정도로 허용 가능한 한계를 넘어 확대됐다는 점, 해결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 진지한 협상 없이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유발하는 증오심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 깊은 상처는 언제쯤 아물 수 있을까요?”

교황님은 핵전쟁의 위험과 관련해 여러 차례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이것이 교황청의 근본적인 두려움인가요? 1914년 사라예보 사건과 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우려하는 건가요?

“핵전쟁으로 향하는 ‘일탈’의 위험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특정 정부 대표들이 얼마나 자주 이런 유형의 위협에 의존하는지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한 일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전략적 선전에 따른 것이길 바랄 뿐입니다. 교황청의 ‘근본적인 두려움’에 관해서는, 이 비극적 상황의 다양한 관계자들이 정의롭고 안정적인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에 더 집착할 수 있다는 데 대한 두려움에 가까운 의미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번역 이창욱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12 3월 2024, 2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