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세르바토레 로마노 (1891년 5월 15일)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1891년 5월 15일) 

교황들의 신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160주년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가 창간 160주년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의 특별 기고를 싣는다. 또한 이탈리아를 비롯해 해외 유수 언론의 편집장들의 기고문이 다섯 차례에 걸쳐 특별판으로 발행된다.

VATICAN NEWS / 번역 이정숙

2021년 7월 1일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가 창간 160주년을 맞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인용된 신문 가운데 하나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로마에서 발행되는 신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일간지로,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된 직후인 1861년 7월 1일 초판을 발행했다. 프랑스 가톨릭 정통주의자 모임이 자금을 지원한 민간 팸플릿(1849년 9월-1852년 9월)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정당 신문”

교황 스스로 “정당 신문(giornale di partito, 기관지)”이라고 정의한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의 7월 1일자는 이 신문에 대한 교황 자신의 열정을 이야기하는 특별 기고를 싣는다. 앞서 교황은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삼종기도에서도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의 창간 기념일을 언급하면서 이 같이 정의한 바 있다. 교황은 오래 전부터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를 향한 열정이 컸다. 교황은 기고문을 통해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어판 주간신문 전체를 읽었다면서, 왜냐하면 「로세르바토레 로마노」가 “교황청, 교회의 가르침, 교회의 삶, 교회의 역사와의 연결고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교황의 이 같은 발언은 프란치스코 지펠(Francesco Zippel) 감독이 “다즐 커뮤니케이션즈(Dazzle Communications)”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반복된다. 다큐멘터리는 교황 신문의 보급을 맡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의 역사를 다룬다. 

교황은 지난 2019년 루마니아 사도적 순방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오는 기내에서 기자들에게도 이 신문을 읽으라고 권했다. 왜냐하면 “해석의 열쇠를 제공하는 신문이며,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교황의 생각을 문서로 증명하고, 해석의 열쇠를 제공하는 신문

1961년 당시 추기경이었던 몬티니(Montini, 훗날 성 바오로 6세 교황)는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창간 100주년을 기념하며 “유일한 일간지”라고 칭했던 이 신문의 사명에 대해, 보도자료를 통해 두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했다. 곧, “교황과 교황청의 생각, 말, 업적을 문서로 증명”하고, 독자들에게 “가톨리시즘과 교회의 시선으로 로마에서 ‘관찰한(osservato)’ 시대의 역사와 영성의 현실에 관한 해석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애의 저널리즘

1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7월 1일부터 5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특별판”이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 함께 실린다. 이 특별판은 또 다른 특별판 및 이벤트와 함께 연중 내내 계획된 시리즈의 시작이다. 스페인 최대 일간지 「엘 파이스」(El Pais)부터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Le Monde), 이탈리아 가톨릭 일간지 「아베니레」(Avvenire),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 브라질 일간지 「폴라 데 상파울루」(Folha de S.Paulo), 이탈리아 월간지 「리메스」(Limes)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탈리아를 비롯한 해외 유수 언론의 편집장들의 기고가 실린 5부의 특별판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다. “우리가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면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저널리즘은 어떻게 변화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교황 회칙 「Fratelli tutti」가 코로나19 대유행의 폭발로 인한 비극적이고 불가피한 위기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애의 저널리즘’을 위한 안내서가 될 수 있을까?”

복음 묵상을 맡은 여성들

사실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게 창간 기념일은 영광스러운 지난날을 회상하는 게 아니라 건설적으로 미래의 도전에 자신을 여는 것이다. 따라서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의 발전 프로그램은 “미래의 새로운 계획들을 여는 굳건하고 유망한 성장 안에서 종이 신문과 전자 신문의 통합으로” 진행된다. 보도자료는 “최근 2년 동안 이 신문의 현대화 노력은 지난 10월 4일 교황 회칙 「Fratelli tutti」 반포를 계기로 내용, 형식, 그래픽을 다시 고안하고 쇄신하는 도약의 가속화를 경험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7월 1일부터 20유로의 가격으로 1년 동안 신문 전체(이탈리아어 일간신문 + 6개 주요 언어의 주간신문)를 구독할 수 있는 홍보 캠페인이 시작된다. 또한 7월 1일부터 주일 복음에 대한 주간묵상인 ‘좋은 소식(La buona notizia)’의 필진으로 성경과 영성에 권위있는 여성 전문가 5명이 사상 처음으로 나선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세계 교회의 여성들」(Donne Chiesa Mondo)’의 협력자이기도 하다. 이 여성 월간지는 지난 5월 100호를 발행했으며, 리타 핀치(Rita Pinci) 편집장이 주도하는 편집위원회의 지도 아래 힘찬 모험을 이어가고 있다. 여성이 쓴 묵상 시리즈는 비볼도네의 베네딕도 수도원 마리아 이냐지아 안젤리니 원장 수녀가 시작한다. 이어 루치아 반티니, 로살바 마네스, 로셀라 바르조티, 그리고 플비아 시에니 수녀가 그 뒤를 잇는다. 

역사

보도자료는 이 신문의 연대표도 실었다. 연대표는 이 신문이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지면이 적고 발행부수가 제한적이지만 “이 신문의 독특한 특징들, 특히 근현대 시대의 교회와 교황 역사의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밝혔다. 또한 사실 “이 신문의 탄생은 교황의 세속권 종말 시대와 이른바 ‘로마 문제(questione romana, 이탈리아 왕국의 교황령 점령에 따른 교황과 교황청의 지위 문제)’의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신문은 로마로 정치적 망명을 한 포를리 출신의 니콜라 잔키니(Nicola Zanchini) 변호사와 볼로냐의 주세페 바스티아(Giuseppe Bastia) 기자의 주도로 시작됐다. 이 두 사람의 생각은 교황청 내무차관이자 훗날 비오 12세 교황의 조부인 마르칸토니오 파첼리(Marcantonio Pacelli)가 구상하던 계획과 일치했기 때문에 실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신문은 처음부터 “진리의 친구”라고 불릴 수밖에 없었다. 창간호부터 “정치와 도덕의 신문”이라는 표제를 넣었고, 이후 “정치 종교 일간지”가 됐다. “1862년 1면에 게재됐던 사설의 논쟁적 특징을 나타내던 두 라틴어 표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표제에 사용되고 있다.” 두 라틴어 표현은 로마법에서 가져온 문구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unicuique suum)” 그리고 복음 인용문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non praevalebunt)”이다.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주일과 바티칸에서 공휴일로 지내는 종교적 축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에 인쇄된다. 이탈리아어로 편집되지만 교황 문헌들(교황 회칙과 다른 문헌들의 경우처럼)은 종종 라틴어로도 찾아볼 수 있다. “국제화된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기관지 공동체의 노고와 수년간에 걸쳐 풍부해진 경험으로 발행되는 주간신문은 (이탈리아어 외에도)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 포르투갈어, 독일어로 발행되고, 지난 2007년부터는 인도 남서부에서 사용되는 언어인 말라얄람어로도 발행된다. 폴란드어는 월간신문으로 발행된다. “‘우리 정보(Nostre informazioni)’를 위한 공적 성격을 지닌 교황청의 유일한 신문으로 칼럼에는 교황 일반알현과 임명에 관한 목록”이 포함돼 있다. 아울러 교황의 발표문(연설, 강론, 문헌), 교황청과 전 세계 가톨릭교회 관련 소식, 국제·문화·종교적 정보를 종합적으로 싣는다. 

다양한 사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민간 자금으로 운영됐으나 비오 9세 교황의 지원을 받은 소식지의 두 창립자들은 첫 편집장들이 됐고, 아우구스토 바비에라(Augusto Baviera) 후작이 그 뒤를 이었다. 비오 9세 교황의 대자(代子)인 아우구스토 바비에라 후작은 사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엔 기자로 공의회 작업을 지켜보기도 하면서 1866년부터 1884년까지 이 신문을 이끌었다.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왕국 군대가 (교황령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전을 거둔) 포르타 피아(Porta Pia) 입성 직후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발행을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같은 해 10월 17일 「조르날레 디 로마」(Giornale di Roma)의 뒤를 이어 교황청 공식 기관지가 됐다.”

보도자료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884년 레오 13세 교황이 최종적으로 교황청을 위해 신문사의 소유권을 얻었다. 비오 10세 교황과 베네딕토 15세 교황의 도움으로 초기 4면 발행에서 1911년부터 6면으로 늘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편집방향을 특징짓는 공정성의 선택은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에는 주세페 달라 토레(Giuseppe Dalla Torre) 백작이 편집장으로 임명됐고, 성 요한 23세 교황의 여명기까지 거의 40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한편, 이탈리아 왕국과 바티칸 시국 사이의 ‘화해(Conciliazione) 조약(라테라노 조약)’에 이어 바티칸 시국의 탄생과 함께 편집부 사무실은 창립 이래 로마 중심지에서 12번 자리를 옮긴 뒤 1929년 말 레오 성벽 안(바티칸 시국 안)으로 옮겼다. 이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의 자유 제한에 저항하고, 당시의 주요 전체주의 계급과 싸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 위해 페데리코 알레산드리니(Federico Alessandrini)나 귀도 고넬라(Guido Gonella)와 같이 파시즘에 반대하는 가톨릭 협회 출신의 주요 편집자와 협력자들이 활약했다. 이 모든 것은 최대 평균 발행부수(6만 부, 최고 10만 부 이상)와 역사적인 칼럼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가 유명해진 것과 일치했다. “악타 디우르나”는 귀도 고넬라가 감수하고 제2차 세계대전과 전쟁 이후까지 계속된 국제정치에 대한 논평을 담았다. 1960년에는 「라베니레 디탈리아」(L’avvenire d’Italia) 신문을 30년 넘게 이끌었던 라이몬도 만지니(Raimondo Manzini)에게 경영을 맡겼다. 그의 임기 동안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준비와 발전 과정을 따라갔다. 

1978년 초 지식인이자 저술가인 발레리오 볼피니(Valerio Volpini)가 후임이 되어 그래픽을 교체했다. 자코모 만주(Giacomo Manzù)의 디자인으로 구성된 특별판의 1면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여기에는 같은 해 루치아니 추기경(훗날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교황 선출 그리고 보이티와 추기경(훗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교황 선출을 발표한 특별판 디자인이 포함됐다. 한편 이미 이탈리아 가톨릭 액션의 회장이었던 마리오 아녜스(Mario Agnes)가 1984년부터 23년 동안 이 신문을 이끌었다. 이 기간은 실제적으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긴 재위기간 전체를 뜻한다. 활자판에서 컴퓨터로의 전환과 함께 새로운 컴퓨터 기술의 도입과 관련된 그래픽의 변화는 1991년 7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1997년부터 인터넷 네트워크에 연결됐다. 

「세계 교회의 여성들」 탄생

사학자 겸 교부철학 정회원인 조반니 마리아 비안(Giovanni Maria Vian)은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함께 2007년부터 이 신문을 향후 10년 동안 이끌었다. 그는 신문의 1면과 마지막 면에 컬러를 삽입했고, 가톨릭 신자가 아닌 이들과의 협력도 진행했다. 편집부에 첫 여성을 고용한 후 월간 “세계 교회 여성들”을 시작했다. 2012년 5월 처음으로 신문의 인쇄물로 발행됐고, 이후 2016년 형태를 바꿔 잡지가 됐다. 

바티칸 미디어의 통합

현재의 커뮤니케이션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고자 ‘홍보처(현 교황청 홍보를 위한 부서)’ 설립에 관한 자의 교서를 발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작업에 따라,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바티칸 미디어의 통합 과정에 포함됐고, 2018년 12월 저술가 겸 에세이스트 안드레아 몬다(Andrea Monda)가 편집장으로 임명되면서 큰 힘을 얻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의 주제를 심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2020년 3월 26일부터 10월 3일까지 (종이) 신문 인쇄를 잠정적으로 중단했으나, 디지털 버전을 계속 발행하며 새로운 누리집을 활성화했다. 무엇보다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에서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앱스토어와 플레이스토어를 통해 무료로 앱을 다운받을 수 있게 했다. 이어 타이포그래피를 새롭게 하고, 이미지 향상과 새로운 내용, 주간 주제별 특별판으로 구성된 종이 (신문) 발행도 재개했다. 요일별 특별판은 △화요일: 문화적 통찰을 위한 “이모저모(Quattro pagine)” △수요일: 세상의 길을 걷는 “야전 병원”으로서의 교회에 중점을 둔 “교회의 재발견(Religio)” △목요일: 교황의 말씀과 행보에 초점을 맞춘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간” △금요일: ‘세계화된 세상의 이야기’로 꾸민 “아틀란테(Atlante)”로 구성됐다. 편집부 사무실은 11월 초 「바티칸 라디오」의 역사적인 본부가 있는 피아 광장의 바티칸 미디어 건물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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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6월 2021, 0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