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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9월 2일 오전 교황청 사도궁 내 산 다마소 안뜰. 코로나19 전염병 확산 예방조치 이후 189일만에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요 일반알현이 진행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형식적인 변화”를 피하면서, 공동선이라는 측면에서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복구 단계를 재고해야 한다고 강하게 권고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세상 치유”:  5. 연대와 믿음의 덕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수개월 만에 우리의 만남이 비대면이 아니라 대면으로 이뤄졌습니다. 직접 얼굴을 마주보고 말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현재의 코로나19 대유행은 우리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쁜 일이건 좋은 일이건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위기를 잘 벗어나려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해야 합니다. 함께해야 합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혼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함께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우리 모두가 연대해서 함께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연대(성)(solidarietà)’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인류 가족으로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공동의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터전으로 주신 공동의 집, 지구-동산,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의 목적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모든 사실을 잊을 때, 우리의 ‘상호의존(interdipendenza)’은 그저 몇몇 타인에 대한 ‘의존(dipendenza)’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상호의존과 연대의 조화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늘어나는 불평등과 소외화에 의존하게 됩니다. 몇몇 타인에게만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적 구조를 약화시키고 환경을 악화시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항상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가르친 것처럼 연대성의 원칙이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합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38-40항 참조). 서로 연결된 세상에서 우리는 같은 “지구촌”에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체험합니다. (지구촌이라는) 이 표현은 아름답습니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큰 세계란 다름아닌 지구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이러한 상호의존성을 연대성으로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상호의존성과 연대성 사이에는 긴 여정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개인이나 국가 및 권력 집단의 이기심과 이념적 경직성은 “죄의 구조”(「사회적 관심」, 36항)를 키웁니다. 

“‘연대성’이라는 말은 조금은 오래되고 때로는 개념이 잘못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쩌다가 베푸는 자선행위 이상의 것입니다. 이는 소수의 재화 독점을 극복하고 공동체 차원에서 모든 사람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전제로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88항). 이것이 바로 연대성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저 다른 이들을 돕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입니다. 바로 정의에 관한 문제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938-1940항 참조). 연대하고 열매 맺기 위해서는 상호의존성이 인간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안에 깊숙이 뿌리내려야 하며, 사람들과 땅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인간과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연결 관계를 무시하고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에 도달하고자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설명하는 바벨탑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창세 11,1-9 참조). 이는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싶어할 때마다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하려는 이야기입니다. 나 혼자만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바벨탑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타워와 고층빌딩을 건설하지만, 공동체는 파괴합니다. 우리는 건물과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지만, 문화적 부를 훼손합니다. 우리는 땅의 주인이 되고 싶지만, 생물다양성과 생태 균형은 파괴합니다. 얼마전 일반 알현 때, 올해 초에 있었던 산 베네데토 델 트론트의 어부들과의 만남에 대해 여러분에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저에게 “저희들은 바다에서 24톤의 폐기물을 수거했다”면서 “이 가운데 절반이 플라스틱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물고기 잡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바다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쓰레기를 치우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선물로 주어진 지구와 연대하지 않고 생태적 균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구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연대하지 않을 때의 “바벨 증후군”을 묘사한 중세 때의 한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이 중세 때의 이야기는 탑을 건설하는 동안 노예였던 한 남자가 떨어져 죽었는데 아무도 말 한마디 없었으며, “불쌍한 친구, 실수로 떨어졌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벽돌이 떨어지면 모두가 불평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벽돌을 떨어뜨렸으면, 그 사람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벽돌을 준비하고 굽는 데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벽돌을 만드는 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벽돌 한 장이 인간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각자 오늘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봅시다. 불행히도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금융 시장의 일부 주가가 떨어지면, 우리가 최근 며칠 동안 신문에서 본 것처럼, 그 소식은 모든 방송 매체에서 전해집니다. 반면, 수천명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가난 때문에 쓰러져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일반알현을 시작하면서 들은 것처럼, 바벨의 반대는 성령 강림입니다(사도 2,1-3 참조). 바람과 불 모양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성령께서는 다락방에 숨어있는 공동체를 가득 채우시고, 하느님의 힘을 불어넣으시며, 밖으로 나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이신 예수님을 선포하도록 재촉합니다. 성령께서는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만들고, 조화를 이루십니다. 바벨탑 이야기에는 조화가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돈을 벌기 위해 앞으로 가는 것만 있습니다. 그곳에서 인간은 단순한 도구, 단순한 “노동력”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성령 강림 때는 비록 우리 각자가 도구였음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공동체 건설에 참여하는 공동체적 도구였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모든 사람들에게, 피조물에게, 형제나 자매라고 이름 불렀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11항 참조; 성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의 대 전기」(Legenda maior), 8; 「프란치스칸 원전」, 1145 참조). 늑대도 형제라고 불렀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성령 강림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다양성과 연대성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의 믿음을 가능하게 하고 또 고취시키십니다. 다양성과 연대성이 조화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게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연대적인 다양성은 “항체”를 가지고 있어서, 유일하고 반복되지 않는 선물, 곧 각자의 독창성이 이기심이나 개인주의에 병들지 않도록 합니다. 또한 연대적 다양성은 정의롭지 않고 억눌린 시스템으로 퇴화된 사회 구조와 과정을 치유하기 위한 항체를 가지고 있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92항 참조). 그러므로, 오늘날 연대성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의 세계로 나아가고, 대인관계 및 사회적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연대의 길을 계속하지 않으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우리는 예전과 동일하게 남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19 대유행은 하나의 위기입니다. 위기를 벗어나면서 더 나아지든지, 혹은 더 나빠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위기에서 더 잘 벗어나는 길은 피상적인 변화나 모든 것이 괜찮아 보이도록 겉만 꾸미는 게 아니라, 연대성입니다. 피상적인 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위기를 벗어나면서 예전보다 더 나아져야 합니다. 

위기 속에서 믿음이 주도하는 연대성은, 분열시키고 결국엔 무너져 버리는 탑이나 장벽을 쌓지 않으면서 - 오늘날 얼마나 많은 장벽을 쌓고 있는지요 -, 공동체를 만들고 진정 인간적이며 견고한 성장 과정을 지원하면서,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우리의 세계화된 문화 안에 접목할 수 있게 해줍니다. 연대성이 이러한 것들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질문 한 가지 하겠습니다. ‘나는 다른 이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생각하는가?’ 각자 마음속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위기와 폭풍 속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이 부서진 것처럼 보이는 이 때에 지원과 의미와 견고함을 줄 수 있는 연대성을 일깨우고 활성화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령의 창의성이 우리가 새로운 형태의 가족적 환대, 풍성한 형제애, 보편적 연대성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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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9월 2020, 2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