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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가난한 이의 날 강론… “가난한 이들은 우리를 하늘나라에 쉽게 들어가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 ‘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미사를 거행하고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나’에서 벗어나라는 부르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가톨릭 신자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상표 달린 옷을 입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며 예수님과 같은 언어, 곧 ‘너’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번역 이창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동시대인들 뿐 아니라 우리도 놀라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을 찬양하는 동안,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루카 21,6)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하나의 건축물에 불과한 게 아니라 유일한 종교적 표징이며 하느님을 위한 집이자 믿는 이들을 위한 집인, 매우 거룩한 시설을 향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하느님 백성의 견고한 확신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예언을 왜 하시는 걸까요? 세상이 갈수록 더 궁핍해지는데, 왜 주님께서는 확신이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시는 걸까요? 

예수님의 말씀에서 대답을 찾아봅시다. 오늘 그분께서는 ‘거의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하십니다. 연중시기의 끝에서 두 번째 주일인 오늘, 그분께서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은 것이 허물어지며 사라진다고 설명하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사라지시는 게 아니라, 성전이 사라집니다. 인간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인류의 국가들과 인간적 사건이 사라집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이따금씩 확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라집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성전처럼 웅장한 현실이지만, 큰 지진처럼 무서운 것이며, 하늘에서는 큰 표징이 일어나고 땅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들입니다(루카 21,10-11 참조).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는 신문기사 1면을 장식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2면으로 넘기십니다. 1면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 남습니다. 곧 살아계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어올리는 온갖 성전보다 더 한없이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과 인간 개개인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뉴스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두 가지 유혹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서두름, 곧 ‘빨리빨리’ ‘지금 당장’이라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가까웠다”(루카 21,8)면서 종말이 지금 당장 도래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따라가선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쓸데없는 걱정을 퍼트리고 타인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마음과 정신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음과 같은 유혹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지요. ‘모든 것을 지금 당장’ 알기 위해 정신 없이 서두르는 유혹, 선풍적이거나 스캔들이 될만한 최근 뉴스, 진흙탕 같은 이야기, 더 분노하고 더 강하게 소리치는 자의 외침, “지금 아니면 절대 안 된다(ora o mai più)”고 말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지금 당장’이라는 이러한 서두름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게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당장’ 때문에 소란을 떨면, 영원히 남는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지나가는 구름을 따라가다가 하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최근의 소동에 마음이 뺏겨, 하느님과 우리 가까이 사는 형제를 위해 시간을 더 이상 내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이런 일이 정말로 일어납니다! ‘모든 것을 지금 당장’ 성취하려고 열광적으로 달려가는 동안 뒤처진 사람들은 누구든 성가신 사람이 됩니다. 소모품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노인, 태아, 장애인, 쓸모 없다고 여겨지는 가난한 이들이 그렇게 취급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빈부격차가 악화되는 현실, 그리고 소수의 탐욕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의 빈곤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바쁘게 우리의 갈 길을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에게 서두름에 대한 해독제로 인내를 제시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인내는 사라지지 않는 것, 곧 주님과 이웃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매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내가 하느님의 선물인 까닭입니다. 인내의 선물을 통해 다른 모든 은사가 간직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인내의 선물에 대하여」(De dono perseverantiae), 2,4 참조). 우리 각자를 위해 그리고 교회로서 우리 모두를 위해 선행을 인내롭게 이어가도록, 정말로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시력을 잃지 않도록 청합시다. 이런 것은 서두름의 속임수입니다.

두 번째 속임수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서 떨쳐내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21,8). 곧, ‘자기 중심’ ‘나’라는 유혹입니다. ‘지금 당장’을 찾을 것이 아니라 ‘영원’을 찾아야 할 그리스도인은, ‘나’의 제자가 아니라 ‘너’의 제자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나’라는 변덕스러운 세이렌의 노래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목소리, 곧 사랑에의 부르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목소리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올 것”(루카 21,8)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톨릭 신자”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상표가 달린 옷을 입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언어, 그 사랑의 언어, ‘너’의 언어로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나’를 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나’에서 벗어납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자주, 선행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나’라는 위선이 지배합니까! ‘나는 선행을 실천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가진 것을) 내어줍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필요할 때 되돌려 받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타인을 도와줍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인물에게서 우정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언어는 이같이 말합니다. 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한다”(로마 12,9)고 부추기시며, 보답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주라(루카 14,14 참조)고 하시며, 보상이나 되갚음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루카 6,35 참조)고 부추기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나는 되돌려 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적어도 단 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사람을 친구로 두고 있는가?”

가난한 이들은 ‘나’ 중심의 언어를 말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눈에 소중합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힘으로, 혼자서는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인처럼,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복음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가난한 이들의 존재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마태 5,3 참조)는 복음의 분위기에 젖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이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성가시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그들이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우리의 ‘나’에서 벗어나라는 부르심으로,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갖고 계신 사랑의 시선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으로 받아들입시다. 하느님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가난한 이들이 우리 마음속 자리를 차지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지내며 가난한 이들을 섬기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을 배우고, 무엇이 남으며 무엇이 지나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사라지고 마는, 영원하지 않은 일들 가운데, 주님께서는 오늘 영원히 남게 될, 그 마지막의 것을 우리에게 떠올려주고 싶어 하십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내 사랑(자선)을 청한 가난한 이는 나를 그분께로 즉시 데려가 줍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를 하늘나라에 쉽게 들어가게 합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sensus fidei)은 가난한 이들을 ‘하늘나라의 문지기’로 보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지금부터 이미 우리의 보물이요, 교회의 보물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부유함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것은 결코 늙지 않게 하며, 하늘과 땅을 일치시키고, 인생을 참으로 살만하게 만들어주는 것, 곧 사랑이라는 부유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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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1월 2019, 1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