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알현 일반알현 

“고통받는 이를 단죄하지 않고 일으켜 세우는 국경 없는 교회”

프란치스코 교황은 7월 휴식 후 일반알현을 재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절름발이를 치유한 베드로의 기적을 언급하면서 사도행전에 관한 교리 교육을 이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도록 돕는 우리의 손은 “예수님의 손”이다.

번역 김호열 신부

사도행전에 대한 교리 교육

5.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사도 3,6) 

살아 있고 행하는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 이름으로 기원하기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사도행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지 말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선포의 진실을 증언하는 구체적인 행동에도 의존합니다. 이는 사도들의 행함으로 일어나는 “이적과 표징”(사도 2,43)에 관한 것으로, 자신들의 말을 확인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사도들이 전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을 통하여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마르 16,20). 사도들이 행한 수많은 표징과 기적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첫번째 치유 사화를 만납니다. 기적을 대면합니다.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번째 치유 사화입니다. 이 사화는 선교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으며,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신앙 체험의 중심인 성전으로 갑니다. 성전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루카는 그 시간을 명시합니다. 구시입니다. 곧, 오후 3시입니다. 이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희생 제물을 바치는 시간입니다. 희생 제물은 하느님과의 친교의 표징입니다. 아울러 그 시간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 한 번”(히브 9,12; 10,10) 바치며 죽으신 시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아름다운 문(la porta Bella)”이라고 불리는 성전 문 곁에서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였던 걸인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은 왜 문 곁에 있었습니까? 모세의 율법(레위 21,18 참조)은 어째서 죄의 결과로 간주된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금지 했을까요?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를 두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했던 질문을 기억합시다.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장애의 근원에는 항상 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 성전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금지 당했습니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버려진 많은 사람들의 패러다임인 절름발이는 성전 문 곁에서 매일 했던 것처럼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 안에는 들어 갈 수 없었지만, 문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 도착하자 눈빛 전쟁이 시작됩니다. 절름발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합니다. 반면 사도들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다른 선물을 받기 위해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을 보라고 권유합니다. 

절름발이는 그들을 쳐다보았고, 베드로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사도들은 관계를 세웠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항상 대화하고 항상 감사하고 마음의 영감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랑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만남을 통한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들입니다. 

성전은 종교의 중심지이자 경제적, 재정적 교류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성전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여 예언자들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질책하셨습니다(루카 19,45-46 참조). 저는 이에 대해 성사들보다 돈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본당들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가난한 교회가 되십시오! 가난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그 걸인은 사도들을 만나 돈은 받지는 못했지만, 인간을 구원하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살아 있는 사람의 자세로, 곧, 베드로는 서 있는 자세로 이 환자를 만지고,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면서, 불구자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행위에서 “부활의 모습”(『사도 행전에 대한 강론』, 8)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장벽 대신 우정과 연대의 가교를 만들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인류를 직접 대면 할 수 있는 교회의 모습 말입니다. 손을 잡을 줄 알고, 단죄하지 않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동행하는 “모든 이의 어머니로 여기는 국경 없는 교회”(『복음의 기쁨』 (Evangelii Gaudium), 210항)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손을 내미시고, 항상 일으켜 세우려 하시고, 군중들이 치유되어 행복하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는 “다른 이의 거룩한 땅”에 접근하는 조심성을 특징으로 하는 “동행의 예술”입니다. 이 여정은 “힘차고 꾸준한 발걸음으로 이루어지고 존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시선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시선이 치유하고 해방시키며 그리스도인 생활의 성숙을 독려합니다”(『복음의 기쁨』, 169항). 이것이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절름발이에게 한 일입니다. 절름발이를 바라보고, “우리를 보시오”라고 말하고,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세우고 고쳐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하십니다. 어려운 순간에, 죄의 순간에, 슬픔의 순간에 우리는 이것을 생각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보아라, 내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손을 잡읍시다. 우리는 우리를 일으켜 주시라고 내어 맡깁시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용한 수단을 신뢰하지 말고, 부활하신 분과의 관계인 진정한 부를 신뢰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2코린 6,10). 우리의 모든 것은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 이름의 힘을 나타내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부는 무엇이며, 우리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부자로 만들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와 찬미를 증거하기 위해, 우리의 삶에서 그분 사랑의 선물을 기억하는 데 있어서 감사의 기억을 달라고 아버지께 청합시다. 다음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항상 다른 사람이 일어설 수 있도록 뻗은 손은 예수님의 손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우리의 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예수님의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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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8월 2019, 17:42